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임정 주석 백범 김구와 보성 쇠실 마을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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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임정 주석 백범 김구와 보성 쇠실 마을의 인연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여관서 일본 장교 살해||1898년 인천감옥 수감…탈출후 쇠실마을 은거||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국권회복운동 전념||해방 후 1946년 48년만에 쇠실마을 다시 찾아||인연 기념해 마을에 ‘은거 기념관·추모비’ 조성
  • 입력 : 2020. 07.14(화) 18:27
  • 편집에디터

인천감옥을 탈옥한 김구가 광주, 함평, 강진, 해남, 장흥 등을 돌아 보성 쇠실 마을에 숨어들어 40여 일을 지낸 김광언의 집.

김광언 집 마루에 앉아 48년 전을 회고하는 김구.

쇠실쉼터에 세워진 김구 은거 추모비

김구가 은거중 시용했던 쇠실마을 우물.

쇠실마을 은거후 떠나면서 김구가 역사서 '동국사기'의 책에 남긴 석별의 시 '이별난(離別難)'.

김구, 쇠실 마을을 찾다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살아생전 전남 보성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는다. 김구가 보성에서도 오지인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았던 특별한 인연을 알기 위해서는 2017년 개봉된 영화 '대장 김창수'의 소재가 된 '치하포 사건'을 알아야 한다.

1896년 3월,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여관에서 일본군이 분명한데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는 사람을 만난다. 흰 두루마기 사이로 칼집도 보였다. 김구는 이 자가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아닐까. 그가 아니라면 공범일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김구는 "내가 저 한 놈을 죽여서라도 우리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국가의 치욕을 씻어보리라"라며 그를 처단한다. 김구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으로 단정하고 살해한 자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고 타살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감옥으로 이감된다. 당시 김구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일본영사 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9월 12일 '대명률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법부에서는 형을 연기하라는 전보를 인천감리서에 보냈다. 그리고 10월 23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고종은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라고 적힌 쪽지를 보고 사형 집행을 중지하는 어명을 내린다. 고종의 어명은 3일 전 개통된 전화를 통해 인천감리서로 전달된다. 문명의 이기로 가설된 전화가 김구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훗날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국모의 원수를 죽인 김구는 인천감옥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김구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며 격려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병마우후를 지낸 강화도 사람 김주경도 그중 한 분이다. 김주경은 사재를 털어 백방으로 김구 구명에 나선다. 김구 구명이 여의치 않자 더 큰 일을 위해 탈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쓴다. 김구는 이듬해인 1898년 3월 19일 인천감옥을 탈출한다. 김구가 탈옥하자, 일제는 김구 대신 부친 김순영을 수감시킨다.

인천감옥을 탈옥한 후 김구는 서울, 수원, 오산을 거쳐 광주, 함평, 강진, 해남, 장흥 등을 돌아 보성 쇠실 마을에 숨어든다. 쇠실 마을과 첫 인연을 맺게 된 연유다. 『백범일지』에도 "종씨(宗氏) 김광언 등 집에서 40여 일을 쉬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구는 안동김씨다. 안동김씨였던 해주 출신 김구가 어떻게 안동김씨 집성촌인 보성 쇠실 마을을 찾아갔을까? 김구는 쇠실 마을에 들어오기 직전, 강진 내동마을 김창묵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김창묵도 안동김씨였다. 김창묵은 "강진은 사방이 트여 은신처로 적합하지 않으니 안동김씨 집성촌인 보성 쇠실 마을로 가는 게 좋겠다"라는 권유를 한다.

김구가 쇠실 마을을 찾자, 일면식도 없는 청년 김구를 동네 사람들은 따뜻하게 맞아 준다. 그리고 달포 간 김광언의 집에 머문다. 40여 일 동안 김광언 등과 더불어 학문과 시국을 논하고, 중국 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공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운다. 동네 분들도 정성을 다해 대했다.

그래서였을까? 김구와 쇠실 마을 주민들은 매우 힘든 이별을 한다. 마을 주민인 선계근씨 모친인 안씨 부인은 자수를 새긴 필랑(筆囊, 붓과 벼루 등을 넣는 주머니)을 김구에게 선물로 주었고, 김구는 자신이 애지중지 읽던 역사서 '동국사기(東國史記)'의 책 속표지에 '이별난(離別難)'이라는 석별의 시를 쓰고, 김두호라는 가명으로 사인한 후 김광언에게 건넨다.

"이별은 어렵고도 어려워라/ 이별은 힘들어도 꽃은 피었네/ 꽃가지 하나 꺾어서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종가에 남기고 반은 가지고 떠나리/ 이 세상 사노라면 언젠가는 만나련만/ 이 강산을 버리고 가려니 이 또한 어렵구나/ 네 친구와 더불어 한 달 남짓 노닐다가/ 석별의 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떠나네"

이별난은 23세 청년 백범의 한시 수준을 가늠케 해주는 수작이다. 행간에는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약속도 숨어 있다. 실제 김구는 떠나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라는 언약을 남기고 떠난다.

김구, 다시 쇠실 마을을 찾다

1898년, 김구는 쇠실 마을을 떠난 뒤 여기저기 숨어 지낸다. 한때는 마곡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후 치열하게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투신한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배후가 김구임이 알려지면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내무총장, 국무령, 내무장, 재무장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오른다.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해방을 맞는다. 미 군정으로부터 임시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채 1945년 11월 3일 입국했지만, 임시정부 주석을 맞이하는 국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1946년 9월,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신분으로 삼남 지방을 찾는다. 치하포 사건 당시 도망자 신분이던 자신을 숨겨주고 도와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40여 일 머물렀던 보성 쇠실 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의 감격적인 답방 모습은 김구의 음성이 담겨진 『백범일지』가 제격이다.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쇠실 마을, 필자주)는 48년 전 망명할 때 수삼 개월(40여 일의 오류, 필자주)이나 머물렀던 곳이다. 그곳은 나의 동족들이 일군 동족 부락인데, 동족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방 동포들의 환영 역시 성황을 이루었다. 입구의 도로를 수리하고 솔문을 세웠으며, 환영나온 남녀 동포들이 도열하여 나를 맞이하는지라 걸어서 동네로 들어갔다. 내가 48년 전 유숙하며 글을 보던 고 김광언씨의 가옥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환영하니, 불귀의 객이 된 김광언씨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백범이 다시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보성군민들은 보성역에서 쇠실 마을까지 빨간 카펫 대신 깨끗한 황토를 깔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파리의 개선문보다 더 멋진 소나무 대문(솔문)을 세워 환영했다. 1946년 9월 22일, 두 번째 답방 모습이다.

백범은 김광언의 집 마루에 앉아 48년 전을 회상하며, 당시 따뜻했던 마을 사람들의 정에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안타까움도 있었다. 김구가 은거했던 집은 그대로인데, 집주인이던 김광언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김구를 어린 나이에 보았다는 종족인 김판남씨는 김구가 주고 간 『동국사기』를 내보인다. 『동국사기』를 본 김구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필랑을 준 안씨 부인과는 보성읍에서 재회한다. 김구는 안씨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 나오자, 이들과의 만남을 "감격에 넘치었다"라고 『백범일지』에 소회를 남긴다. 48년 전 필랑의 추억이 백범 김구를 감격하게 만든 것이다.

쇠실마을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쇠실 마을을 찾다

김구 선생의 은거지 보성 쇠실 마을, 뒷산은 대룡산이고 앞산은 반섬산이다. 그 두 산 사이로 난 길이 목포에서 영암·보성을 거쳐 순천으로 가는 국도 2호선이다. 보성과 예당 사이에 쇠실 쉼터가 있는데, 그 근처가 쇠실 마을이다.

쇠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도 2호선 밑 터널(토끼굴)을 지나야 한다. 터널 입구 왼쪽에는 '쇠실 마을' 표석이, 오른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 은거기념관' 표지판이 서 있다. 터널은 차량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인데, 버스를 타고 들어갈 때마다 통과할 수 있을지 가슴 졸이곤 한다.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 토끼굴을 지나면 마을 앞에 버스 주차장이 있고,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김구 선생의 은거지였던 김광언의 집이 나온다. 대문 앞 오른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이라 새긴 표석이 서 있고, 왼쪽에는 김구와의 인연을 기록한 '백범 김구 선생 은거가'라 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김광언의 집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지금 집은 김구가 당시 머물렀던 모습은 아니다. 당시 사진 속 집은 5칸의 초가집인데, 지금은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사진 속 5칸 집은 김광언이 마을의 중심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이 집에서 김구는 1898년 40여 일을 머물렀고, 1946년 9월 마루에 걸터앉아 마을 사람들과 당시를 회고하며 정담을 나눈 것이다. 김광언의 집은 김구 선생이 두 번이나 다녀가면서, 역사의 현장이 된다. 김광언의 집과 마루는 짧은 인연마저도 소중하게 여기는 김구의 따뜻함이 녹아 있는 장소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김광언의 집 왼쪽에는 쇠실 마을과의 소중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 2006년 건립된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이 서 있다.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필자가 본 가장 아담하고 소박한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김구 선생이 걸어온 독립운동의 길, 김구 선생과 보성 쇠실 마을, 김구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 등 쇠실 마을과 맺은 소중한 인연이 잘 정리되어 있다. 덤으로 보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들도 소개되어 있고, 구석에는 김구 선생의 휘호 6점도 걸려 있다. '白丁凡夫(백정범부)', 爭頭爭足(쟁두쟁족)'도 그중 하나다. '백정범부'에는 가장 낮은 계층인 백정과 평범한 범부들의 애국심이 자신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이 들어 있다. 머리 즉 우두머리가 되려고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기를 다투라는 '쟁두쟁족'은 "열심히 발 노릇을 하다 보면 하기 싫어도 밀려서 우두머리가 된다"는 의미인데, '쟁족'을 강조한 말이다.

기념관 마당 왼쪽에는 2006년 건립된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가 서 있고, 왼쪽에는 김구가 떠날 때 남긴 시 '이별난(離別難)'을 새긴 비도 서 있다. 한시인데 번역문도 함께 새겨 읽기가 편했다. 이별난은 23세, 김구의 한학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 준다.

기념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뒷산에 올라 운동한 후 내려와 목을 적신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손에 모자, 왼손에 지팡이를 든 김구가 서 있다. 할아버지 김구가 아닌 23세 김창수의 모습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 같은데, 그래도 정겹다.

우물이 있는 곳은 마을 제일 위쪽이다. 마을은 대룡산(445미터)의 웅장한 산세에 빙 둘러싸인 분지 형태다. 완전히 단절된 심산유곡, 김구가 숨어지내기는 안성맞춤의 동네였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을로 들어오는 유일의 길도 좁은 샛길이었을 것이다.

쇠실 마을 가까이 국도변에 있는 쇠실 쉼터에도 1990년 건립된 김구 은거 추모비가 서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