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의 여의도칼럼 2>"5·18 왜곡처벌법, 21대국회 1호법안으로…제발 이런 법 필요 없는 세상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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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김정현의 여의도칼럼 2>"5·18 왜곡처벌법, 21대국회 1호법안으로…제발 이런 법 필요 없는 세상 왔으면"
  • 입력 : 2020. 05.17(일) 15:54
  • 편집에디터
김정현 정치평론가
5·18처럼 정치적 명암(明暗)을 극명하게 겪은 사건도 없었다. 40년이 흘렀지만 정치적 조류에 따라 대접받기도, 폄훼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요즘은 일부 유투버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조롱하고 있으나 법적 미비로 대응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고 지킨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80년 5·18의 또다른 이름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다. 두 사건은 태생부터 정치적 왜곡이었고 40년이 흘렀지만 끝없는 왜곡과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의 연속이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그다지 크게 조명받지 않았는데 아마 그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DJ 본인이 사건 자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한평생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화해와 통합의 정치철학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일부 김대중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저평가됐고 재조명되야한다고 아쉬워 하기도 한다.

실제로 DJ는 전두환에 대해 백담사에서 연희동 사저로의 귀환이나 사면결정 등에 대한 협의를 구해올 때 반대하지 않았고 집권 후에는 청와대 초청 등 정치적 보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5·18 진상규명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고, 전두환이 광주재판에서 보여준 반성과 사죄없는 뻔뻔한 모습을 보면 국민들이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치밀한 정치공작으로 기획된 사건이었다. 한국정치사에서 대표적 정치공작사건을 꼽으라면 박정희 시절 인혁당 사건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꼽을 것이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12·12로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면서 1980년 대학생 시위 등이 정점에 이르자 이미 수개월전부터 계획된 대로 김대중을 비롯한 인사들을 무차별 체포, 연행해 정치적으로 엮은 것이 바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었다. 당시를 촬영한 미공개영상을 보면 후일 사형선고를 받은 DJ가 수사관들에게 젊은 대학생들에 대한 불리한 진술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40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로 이해찬 민주당 대표나 설훈 의원 등이 있을 정도로 한국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에는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과 심재철의원이 느닷없이 이 사건을 소환해 설전을 벌여 5·18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모르는 젊은층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둘 다 이 사건에 관련돼 고초를 겪었던 인물들이다.

박정희가 시해된 10·26은 역사적 변곡점이었다. 최근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지만 부마항쟁으로 박정희정권은 종말을 걷고 있었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참았더라면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이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하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DJ도 주변사람들 한테 이 점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만약 그랬더라면 5·18의 비극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도 없었을 것이고 이 땅의 민주주의 시간표도 좀 더 앞당겨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DJ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이 신군부의 노태우와 3당합당한 후 대통령이 돼서 결과적으로 "5·18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라는 말과 함께 5·18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법적 평가를 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나는 당시 상도동계를 이끌면서 평생 민주화운동에 힘써온 그로서는 5·18을 더 이상 놔둘수 없었을 것이고 여기에는 YS 특유의 승부사 기질도 작용했다고 느꼈다. 요즘 일부에서 5·18과 김영삼 전대통령 관계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생각해볼만한 대목이다.

그런면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극에 달했던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들의 전신(前身)이었던 신한국당이 집권하고 있을 때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망월동 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켜놓았으면서 이를 부정하는 자기 모순의 극치였다. 이 시절을 상징하는 사건이 '임을 위한 행진곡' 파동이었는데 수십년간 망월동 묘역에 울려퍼지던 노래를 못부르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5·18에 대한 왜곡, 비방, 폄훼도 일상화 됐는데 이를 막기위해 20대 총선 직후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1호 당론법안으로 '5·18특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것이나 이희호여사가 이사장으로 있던 김대중평화센터가 DJ와 5·18에 대한 왜곡 비방에 대해 정면으로 법적 대응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첫 5·18 때 망월동묘역에서 연설을 해 사람들을 울렸는데 당시 동행했던 안철수대표에게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해원(解?)됐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대통령 취임 이후 5·18은 또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주로 자유한국당 내부문제 때문이었는데 탄핵 후 보수세력이 분열되자 정체성문제가 제기됐고 여기에 극우 유투버들까지 가세해 보수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물로 5·18을 악용했고, 급기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5·18이 북한군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망언이 국회에서 열린 공당의 행사장에서 터져나와 정국은 삽시간에 극한대치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 여파로 5·18왜곡처벌법이 통과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요즘 SNS에 20대국회에서 5·18왜곡처벌법을 통과시키자는 챌린지가 이어지고 있는데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서는 5·18문제에 공감력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얻었으니 여야간 합의로 21대국회 1호법안으로 처리되면 5·18 40주기에 큰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만약 미래통합당이 먼저 과거에 대해 사과하고 이 법의 처리를 약속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5·18왜곡처벌법 자체가 필요없는 세상이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화해와 통합의 5·18정신 아니겠는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