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5>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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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5>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민초들의 고통에 내민 구원의 손길, 바람벽에 되살아난 따스한 체온||- 후불벽화의 효시嚆矢 -
  • 입력 : 2020. 03.19(목) 13:47
  • 편집에디터

1.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전경(사진 황호균)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22년 앞선 종교건물 벽화

무위사 극락보전의 경이로움은 비단 건축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건물 내부 흙벽에 채색하여 그려진 여러 종류의 벽화는 황홀경 그 자체다. 일찍부터 그러한 진가는 드러나서 이번에 다룰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1476년)'에 그치지 않고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1476년)'와 '무위사 극락보전 내벽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1430년, 18〜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보 1종과 보물 2종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는 엄청나다.

후불벽화가 그려진 1476년이란 시기는 조선 제9대왕 성종 7년이고 중국 명 제8대 황제 헌종 12년이다. 서양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8년) 프레스코 벽화보다 22년이나 앞서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성당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1534~1541년) 프레스코 벽화보다 60여 년 정도 빠르다. 이때는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쓰라린 삶 속에서 문학이나 종교를 통해 목가적이며 인간 본위로의 탈출을 꿈꾸던 '중세의 가을' 무렵으로 이른바 '르네상스의 맹아기*'이다.(萌芽期: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 일 따위가 비롯하는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전 후불벽 발생 초기 사례

고려 시대 사원 건축인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은 내부에 후불벽이 등장하기 전의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불전 내부에 전돌을 깔고 그 위에 세로 방향으로 불단과 닫집을 연결한 일체형 목가구 구조물 안에 주존상을 봉안하였다. 불전 내부에 가로방향으로 불단과 후불벽을 설치하는 사원건축은 무위사 극락보전(1430년, 후불벽과 불단 완성 시기 1476년)을 비롯해 봉정사 대웅전(1435년), 개심사 대웅보전(1484년 중창) 등 조선전기 사찰들에서부터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불벽은 이들 가운데 봉정사 대웅전 영산회상벽화(1435년경) 다음으로 이른 시기인 1476년에 등장한 것이다.

고려 불화에서 조선 불화로 이행하는 과도기

신분제가 절정을 이룬 중세. 무위사 후불벽화는 마치 신분계층처럼 불보살을 상・하 구별이 뚜렷한 2단 구도로 배치하는 '고려 불화'의 모습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부처 중심으로 보살이 둘러싸인 원형 구도의 '16세기 불화'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협시보살이 본존불의 어깨까지 올라올 정도로 상당히 진전된 모습이다. 그만큼 평민(하층민 포함)의 지위가 향상된 신분제의 변화상이 후불벽화의 '불보살 구도'에 반영된 것이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반달 모양의 옷자락과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선과 'Ω'형으로 접힌 통견은 고려 후기 단아 양식 불상의 착의법을 계승한 것이다.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한 매듭 끈이 대좌 좌우로 길게 드리워진 점은 조선 초기에 등장한 특징으로 조선 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독특한 옷 주름이다.

협시 보살들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유려하고 힘찬 필선으로 그려졌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는 아미타삼존 중심으로 6인의 나한이 등장하여 아미타불을 중앙 가득히 배치한 구도는 조선 초기에 새롭게 나타난 형식이다.

부드러운 붉은색과 녹색을 주로 한 밝은 채색, 옷의 문양, 4각 대좌 등의 영락 장식은 보다 단순해진 경향을 보이지만 여전히 화려하고 섬세하다. 단아한 형태・밝은 채색・구불구불한 필선을 뒤섞은 옷 주름선・착의법・장식된 대좌 등은 고려 불화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중심 구도라든가 키형 광배・정상 계주・군의의 상단이나 매듭끈 처리 등에서 조선 시대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호화찬란한 고려 불화의 영향과 조선전기의 새로운 수법을 담은 빼어난 솜씨로 국내에 남은 조선 시대 아미타 불화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걸작이다. 흙벽에 천연염료로 그린 그림은 아직도 막 붓을 놓은 듯 선명한 색채가 뚜렷하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협시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 한 채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화면 중앙에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과 왼쪽에는 관음보살이 협시하였다. 그 위 좌우에는 각각 3명씩 모두 6명의 나한은 구름 속에 상체만 드러낸 채 합장하면서 본존을 향하거나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둥근 얼굴에 익살스럽지는 않고 심오한 정신적인 면이 내재되어 있는 개성이 뚜렷한 모습이다. 화면 상단부 좌우에는 피어오르는 구름무늬 끝에 작은 화불이 2분씩 배치되었다.

중앙의 아미타삼존을 벽면 가득히 그리고 나머지 권속들은 작게 묘사한 삼존불 중심의 구도이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고 왼손은 왼 허벅지 안쪽 위에 놓고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은 하품중생인 수인을 취하면서 커다란 키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높은 방형 대좌와 앙련(仰蓮: 피어오르는 연꽃) 모양의 연화 좌대 위에 결가부좌 하였다.

방형대좌는 화려한 장식적 요소가 돋보인다. 앞면 정중앙에 그려진 귀면문은 길게 찢어진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 이마 위에 돋은 뿔, 부릅뜬 두 눈과 날카로운 앞발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귀면문은 수미단이나 와당에 자주 등장하며 온갖 악귀나 잡귀의 침범을 막는 위엄과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방형 대좌와 협시보살 무릎 주변으로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흔히 보이는 푸른색 바탕의 격자형 돗자리 무늬를 바닥에 깔아 놓은 것은 조선시대의 초상화에서 흔히 보이던 모습이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적당한 부피감이 느껴진다. 크고 넓적한 살상투 위에 정상계주를 붉은색으로 표현하였다. 작은 이목구비와 높은 육계 등은 고려 아미타 불화와 닮았다. 착의법에서 속에 군의를 입고 붉은 바탕에 원문이 있는 대의*를 입은 모습은 고려 아미타 불화의 전형적인 착의법이다. 하지만 대의의 원문이 간략해지고 승기지* 없이 군의*만 입은 모습에서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도 나타나기 시작한다.(*大衣: 겉에 걸친 가사, 僧祇支: 불상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옷을 걸쳤을 때 드러난 가슴을 덮은 속옷, 裙衣: 불보살이 걸쳤던 허리에서부터 아래를 덮은 긴 치마 모양의 옷)

관음보살은 높은 보관을 쓴 이마에 아미타부처의 화불을 모시고 있다.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정병을 들고 정면을 향해 왼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몸을 살짝 안쪽으로 비튼 모습이다. 어깨 위로는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얇고 투명한 옷을 걸쳤다. 지장보살은 조의가사(條衣袈裟)에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보주를 들었다. 정면을 향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몸을 살짝 안쪽으로 비틀었다. 관음・지장보살은 피어오르는 연꽃 모양의 연화 좌대를 밟고 서 있다. 양협시 보살의 어깨를 포함한 몸과 양발은 화면 중심을 향하는 예배자를 향해 몸과 발을 대칭되게 모았다. 본존불의 거대한 광배에 비해 협시보살은 둥근 두광과 신광이 아담한 크기로 위아래로 일부 겹치게 그려놓았다.

후불벽화 화기에 담긴 불사 정보

후불벽화 좌우 하단에 가로로 길게 화기란을 마련하여 벽화 제작 정보를 전한다. 좌측 화기 가운데 "▨▨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畵員大禪師海連…"이라는 내용의 연호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히 판독하지 못했다. 다행히 가까운 장흥 보림사 북삼층석탑의 탑지 내용 가운데 "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重修造…無爲寺造主佛設大會安居"에 등장하는 연호와 간지로 미루어 볼 때 '丙申'이라는 간지에 해당하는 '十二年'의 연호는 1400년대에는 '成化'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화기에는 10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허순・전 아산현감 강질・강진군부인 조씨・김씨・강씨・박씨 등 수십 쌍의 일반 평민 부부들의 시주 참여로 대선사 해련(海蓮), 대선사 선의(善義), 죽림(竹林) 등의 화원들이 그렸다. 극락천도를 발원하는 수륙사의 불사였던 까닭에 신분의 지위고하에 얽매이지 않고 광범위한 신분계층의 참여가 이뤄졌다. 현세 구복과 함께 극락왕생에 초점이 맞춰졌다. 대시주 허순은 왕조실록에 기록된 1480년 의주 출신의 역관으로서 중국 사신을 맞이한 이일 가능성이 높다. 벽화에 그려진 명나라 양식과 고가의 금박 무늬를 입힌 점에서 그러하다. 강질은 강진 성전에 분묘가 있는 진주 강씨 양희공파 9세손이다. 이들 외에 오개똥・자섭이 같은 하층민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민초들의 영령을 극락천도한 수륙사, 지장보살에게 올리는 간절한 기도

고려 불화의 아미타삼존 형식에서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점은 고려 후기 이래 유행되었던 지장 신앙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으며 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주기를 기원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반영된 결과로도 이해된다. 그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인근 강진 영암 해남 해안가의 잦은 왜구의 출몰과 기근에서 조선 초기에 수륙제를 지내야만 하는 사회적인 배경이 담겼다. 말하자면 어지러운 세상과 살상, 참혹한 죽음의 행렬 속에서 지장보살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에 대한 공경과 찬사를 가득 담은 신앙 공간

극락보전 내에는 불단인 아미타삼존좌상 뒤편의 후불벽의 앞뒤에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 내벽 사방벽면에 여러 종류의 벽화들로 가득히 그려 장엄하였다. 그야말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에 대한 공경과 찬사를 가득 담은 신앙 공간으로서 기본적인 기능을 충실히 반영한다.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무위사의 중심불전인 극락보전의 주존상인 아미타삼존불상의 뒷면 후불벽을 장엄하는 벽화로 일종의 주존 불상의 배경화인 셈이다. 후불벽화는 앞에 모셔진 불상을 장엄하면서도 예배를 겸하기 때문에 불상과 같은 주제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 아미타극락회상도이다.

파랑새가 다 못 그린 관음보살 눈동자

후불벽은 지탱하는 가구와 흙 벽면은 544년이라는 오랜 시간에도 훼손되지 않고 견고하다. 생동감 있는 후불벽화의 색채에 감탄한 나머지 '파랑새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남루한 차림을 한 노승이 찾아와서 법당에 벽화를 그릴 테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법당에 들어간 노승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음식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 스님은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자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 후 막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으려던 찰나에 인기척을 느낀 나머지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서 지금도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랑새 설화는 전북 내소사 대웅보전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벽화의 제작 시기나 그림 솜씨 수준, 사건 줄거리의 근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파랑새 설화의 원형은 무위사 극락보전 벽화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후불벽화 파랑새 설화 원형질

화기에는 대선사 해련(海蓮) 등이 그렸다고 밝히고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이 아닌 파랑새가 그렸다는 설화가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사실처럼 꾸며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눈동자를 미처 그리지 못한 관음보살 벽화의 미완성에서 깊은 여운과 울림은 극대화된다. 극적인 긴장 구조까지 부여한 서사까지도 갖춰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날아가 버렸다는 파랑새는 후불벽화 앞 관음보살상이 받쳐 든 정병에 꽂혀 있는 버들가지 위나 후불벽 뒷면 백의관음도에도 노비구의 어깨 위의 등 뒤에 아직도 앉아 있다. 관음보살은 현세적 고난 구제와 기복적 측면에서 신앙되었으며 '파랑새'는 관음보살의 분신으로 역사 속에 종종 등장한다.

초의선사 제자이자 <동사열전>의 저자인 대둔사(대흥사) 승려 범해각안이 19세기 말기에 '뒷글'을 지어 본문과 함께 전체 재필사한 <무위사사적(1739년)>에는 "당 오도자의 그림이라고도 하고 관음보살이 관음조가 되고 오도자의 몸에서 작업을 마칠 때까지 변해 있었다."라는 파랑새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는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파랑새가 막 붓을 놓고 간 듯 생생한 색채의 향연

황토색 바탕에 은은한 붉은색 옷자락과 위아래에 배치된 초록색은 풍요로운 황금 들녘을 보는 듯 조화롭다. 투명에 가까운 하얀 실크 사라(紗羅)를 표현한 고려불화 같은 섬세한 관음보살의 묘사는 금방이라도 벽을 뚫고 나올 듯 생동감 넘친다. 귀족불교의 정수인 '고려불화'의 예술성을 계승하여 계층을 초월한 온 민초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려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람벽에 내려앉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온기. 이번 주말에는 파랑새가 막 붓을 놓고 간 듯 생생하게 번지는 색채의 향연에 빠져보시라.

2.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전체(사진 무위사)

3.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중 아미타불화(사진 무위사)

4.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중 지장보살화(사진 무위사)

5.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중 관음보살화(사진 무위사)

6.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중 나한 향좌측(사진 무위사)

7.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중 나한 향좌측(사진 무위사)

8.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화기 향우측(사진 황호균)

9.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화기 향좌측(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