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창본집(김봉호)에 나오는 호남 지명 2018년 8월 10일 본 지면에 를 소개했다. 20세기 초 임방울이 불러 국민 유행가가 된 노래다. 1931년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30년대 취입된 유성기 음반에는 임방울, 정정렬, 하농주, 김금암 등이 녹음하였고, 해방 후에는 박동진, 신평일 등이 취입하였다. 필사본이나 이본들이 많으므로 노랫말이 균일하지 않다. 의 노랫말은 중의법(重義法)으로 구성되었다. 해당 지명에 단어의 본뜻을 입힌 것이다. 김봉호가 쓴 '판소리창본집'을 참고한다. 고창(高敞)은 지세가 높고 탁 트인다는 뜻이고, 익산(益山)은 많은 산, 만경(萬頃)은 수면이 아주 너른 것을 뜻한다. 모든 단어나 어구가 그렇다. 중의는 두세 가지 의미를 담는 어구라는 뜻이다. 대부분 댓구 형식이다. 는 부단히 변해왔다. 신재효본 에 와서야 ...
편집에디터2022.10.20 16:02도로변에서 본 쌍봉마을 풍경. 벼가 누렇게 익으면서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이돈삼 산이 높고 골이 깊다. 육봉, 대산 등 여러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른다. 풍광이 아름답다. 한눈에 봐도 명당이다. 사람이 살기에도 좋아 보인다. 역사와 전통도 묻어난다. 경험칙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두 봉우리가 있다고,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쌍쌍을 이룬다고 '쌍봉(雙峰)'으로 이름 붙었다. 인근에 있는 절집 쌍봉사의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쌍봉사는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창건했다. 마을의 역사가 쌍봉사와 엮인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도 쌍봉사가 세워지면서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사는 마을로 바뀌었다. 김해김씨, 제주양씨, 하동정씨가 연달아 들어오면서 마을이 달라졌다. 마을 입구에 김해김씨 충신각이 서 있다...
편집에디터2022.10.20 16:02혼자 떠난 여행 중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에게 먹는 다는 것은 맛을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막연하게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할 뿐이라면 그 자체가 귀찮아질 때도 있다 맞은편에서 거구의 사내가 밥 먹는 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그 역시 맛으로 먹는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 인간이기 이전에 그냥 동물의 단순한 모습이다 그래, 우리는 서로 인간이지만 사실 다른 동물들과 뭐가 다른 것인가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구사하면서 제법 영리하게 살아가는 척 하지만 세상에 일으키는 크고 작은 말썽은 죄다 우...
편집에디터2022.10.13 17:08덕흥리 무녕왕릉 고분의 인면조 검은닭 오계(烏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烏)는 까마귀라는 뜻 외에 검은색이라는 뜻이 있다. 오(烏)에 단지 까마귀의 뜻만 있다면 오계(烏鷄)나 오골계(烏骨鷄)도 '까마귀닭'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부르지 않는다. 대신 삼족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해석한다. 같은 오(烏)자를 쓰는데 왜 삼족오(三足烏)는 까마귀로만 인식할까? 삼족오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다. 삼족(三足)은 다리가 셋이라는 뜻이고 오(烏)는 까마귀를 말한다. 다리가 셋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고대의 삼족기(三足器)가 단서의 일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솥(鼎)이다. 고대 중국, 양쪽에 귀를 달고 있는 세 발 솥 곧 삼족정(三足鼎)이 오늘날까지 솥으로 통칭된다. 남중국이나 베트남 권역에서 동고(銅鼓, 동으로 만든 북)를 왕실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듯이, 고대 중국에서...
편집에디터2022.10.13 17:07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베트남은 위도 8도 30분~23도 22분 사이에 위치한다. 기후 특징은 위도상의 차이보다는 고도상의 차이로 남부는 열대몬순기후에, 북부는 아열대기후에 속한다. 이 때문에 남부는 건기(11~4월)와 우기(5~10월)로 나뉘어져 연중 여름인 반면 북부에는 4계절이 있다. 여름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해양풍으로 고온 다습하며, 북부의 겨울은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대륙풍으로 춥고 다습하다. 이로 인해 북부에는 겨울과 봄에 자주 가랑비가 오며 특히 습도가 높아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궂은 날씨와 상관없이 북부는 엄연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의 도시였다. 중국 운남성에서 시작해서 베트남을 관통하는(전체 길이는 1,200km, 베트남 내에서는 475km) 홍강이 있어서였다. 홍강 주변은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수산, 건설,...
편집에디터2022.10.06 16:06경렬사. 정지 장군을 비롯 전상의, 정충신 등 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돈삼 또 사흘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연휴는 한글날 덕분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마을'을 찾아간다. 나주 금안마을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보급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보한재 신숙주(1417∼1475)다. 신숙주의 태 자리가 금안마을이다. 금안마을을 '한글마을'로 부르는 이유다. 금안마을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에 속한다. 신숙주는 1417년 금안마을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나 7년 동안 살았다. 마을 한가운데에 신숙주의 생가 터가 있다. 집은 혼자 살던 할머니가 작고한 뒤 수년째 비어 있다. 처마엔 거미줄이 걸리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다. 나주시에서 생가 복원 방침을 밝힌 지 오래지만, 진척이 안 되고 있다. 신숙주에 대한 평가...
편집에디터2022.10.06 16:10판소리 문법은 올려잡아 300여 년 전 생성되었다. 판소리라는 이름은 100여 년 전 만들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판소리의 총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확정되었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판소리 내력이다. 이제 판소리를 '소리'답게 만드는 두 가지 기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기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탁월하다. 판소리를 이면(裏面)의 소리로 만들어낸 원천기술이다. 하나는 리듬을 일정한 패턴으로 범주화한 기술이다. 다른 하나는 선율을 일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한 기술이다. 전자의 기술을 장단(長短)이라 한다. 후자...
편집에디터2022.10.06 14:15공생원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학자 여사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하는 윤 여사(1965) 윤학자 탄생지비(고지현) 윤학자 여사 가족사진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 1965년, 목포시는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압도적 1위를 받은 분이 일본인 윤학자였다. 윤학자(尹鶴子, 1912~1968)가 얼마만큼 목포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인물인지는, 그가 1968년 폐암으로 타계했을 때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장에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참석, 그녀의 마지막을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시 목포의 인구가 16만 명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하면 목포 시민 모두가 운 셈이다. 그녀의 장례는 최초의 목포 시민장이었다. 그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 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이라...
최도철 기자2022.10.05 16:152017년 영국의 미술 전문지 '아트 리뷰(Art review)'에서 미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 된 미디어 아트 작가, 영화감독, 비평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독일 뮌헨 출생, 1966~)은 디지털 기술 기반의 데이터 사회를 성찰적 다큐멘터리 및 연구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등에서 주요 개인전 및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시를 선보였으며 모마,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 퐁피두 센터, 노이어 베를리너 쿤스트 페어라인 등 주요 세계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등 다수의 저서도 미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과 저서에서 선보인 주요 개념은 '포스트 재현(Post-representati...
편집에디터2022.10.05 09:59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K-Food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우리말 '한식'을 영역한 것이 'K-Food'이다. 하지만 한글과 영문의 결이 좀 달라 보인다. 남도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한식(韓食)'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나 식사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 논의되는 K-Food를 딱히 그렇게 정의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음식문화가 식료에 한정되거나 시대에 묶여있지 않고 시절 따라 기호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서구화된 우리의 식단이 그렇고 세계인의 기호 음식이 된 커피 사례가 그렇다. 주지하듯이 K-Food가 부상...
편집에디터2022.09.29 16:31그동안 코로나 대유행으로 좋아하는 여행도 즐기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번에는 세계 경제를 휘어잡고 있는 달러가 초강세인 것이 문제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더 가난해지고 말았다. 이제 해외여행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다. 4차산업 운운 하면서 세상이 갈수록 더 좋아질 것 같이 말하는데 적어도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감은 여러 면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간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거니 해버리면 속이라도 좀 나아질까 요즘 들어 부쩍 세계의 봉이고,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우리지만, ...
편집에디터2022.09.29 16:112010. 추자도 조기축제에서 풍어제 주관하는 송순단 무녀 판소리란 작명은 언제 어디서 누가 한 것일까? 판소리의 생성은 영조 30년(1754)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를 기점으로 잡는다. 250여 년, 당시 이 노래가 존재했었으니 더 올려잡아 300년 남짓 된 셈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지금의 호명인 '판소리'가 있었던 게 아니다. 타령, 창(唱), 잡가(雜歌), 소리, 광대소리, 창악(唱樂), 극가(劇歌), 가곡(歌曲), 창극조(唱劇調)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중에서 어떤 이름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년 조선일보 출판)이다. 올려잡아도 100여 년 밖에 안된다. 더구나 판소리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정노식이 왜 '조선판소리사'라고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라. 판소리 만정(김...
편집에디터2022.09.22 16:31바오다이의 여름별장 외관. 차노휘 유럽의 집과 건물을 자세히 보면 창 모양이 다르다. 한국의 창문 형태가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다면 유럽은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길다. 창 하나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건축 면적에 비해 창문 개수도 적다. 유럽은 건축 자재가 돌과 벽돌이 주재료이다. 이 단단한 벽이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이다. 벽 중심의 건축물은 가로로 널찍하게 창을 내면 벽돌의 하중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창의 가로 폭을 줄이고 대신 세로로 길쭉한 창을 내게 된다. 뿐만 이런 형태의 창문 모양은 세금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창문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앙숙인 영국이 창문세를 거둬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게 꽤나 부러웠다. 그는 창문세를 도입하되 창문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는 영국과 달리 창문 ...
편집에디터2022.09.22 16:29강항 동상. 내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든 민족이 온누리에 횃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때,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연설이다.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한 사자후였다. 광주시민의 심금을 울린 그는 이 집회를 이끌면서 '광주의 아들'로 거듭났다. 박관현동상. 그의 태 자리에서 가까운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박관현(1953∼1982)은 영광군 불갑면 쌍...
편집에디터2022.09.22 16:33이광사 문화거리에 설치된 '서결' 기념물 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1세기 정도 후대의 인물인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초의선사를 찾아 대흥사에 들른다. 그리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촌스럽다고 깎아내리면서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하게 한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에 대해 추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유배가 풀려 8년 만에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 중국 중심의 전통 서법을 추구했던 추사도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 이광사는 김정희의 마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
편집에디터2022.09.15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