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호남가, 그 역사는 훨씬 깊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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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호남가, 그 역사는 훨씬 깊고 넓다"
'호남가'의 내력 찾기||17세기 지명시 '남정부'가||18세기 '남정시'로||이것이 19세기를 거치며||오늘날의 '호남가'로 완숙||남정부 이전에는 우리네||전통적인 타령의 땅이름||각설이들의 숫자타령 등||웅숭깊은내력 담고 있어
  • 입력 : 2022. 10.20(목) 16:02
  • 편집에디터

판소리 창본집(김봉호)에 나오는 호남 지명

2018년 8월 10일 본 지면에 <호남가>를 소개했다. 20세기 초 임방울이 불러 국민 유행가가 된 노래다. 1931년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30년대 취입된 유성기 음반에는 임방울, 정정렬, 하농주, 김금암 등이 녹음하였고, 해방 후에는 박동진, 신평일 등이 취입하였다. 필사본이나 이본들이 많으므로 노랫말이 균일하지 않다. <호남가>의 노랫말은 중의법(重義法)으로 구성되었다. 해당 지명에 단어의 본뜻을 입힌 것이다. 김봉호가 쓴 '판소리창본집'을 참고한다. 고창(高敞)은 지세가 높고 탁 트인다는 뜻이고, 익산(益山)은 많은 산, 만경(萬頃)은 수면이 아주 너른 것을 뜻한다. 모든 단어나 어구가 그렇다. 중의는 두세 가지 의미를 담는 어구라는 뜻이다. 대부분 댓구 형식이다. <호남가>는 부단히 변해왔다. 신재효본 <호남가>에 와서야 비로소 '함평천지'로 시작하는 사설이 정착된다. 지명 관련 노래들을 점검해봐야 할 이유다. 내가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이사장을 할 때, '한국민속학자대회' 분과회의 일환으로 지명 관련 세션을 마련한 바 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윤여정 위원으로부터 「호남가의 판본 형태와 시기적 변화 연구」라는 논문을 받게 되었다. 전남도 김희태 문화재위원으로부터 관련 자료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김석회의 논문이나 이진원의 논문을 통해서 관련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는 이런 선행연구자들의 분석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명가요의 전통

"일신 방탕하야 사해를 둘러보니/ 강산의 병이 들어 세월을 허도할가/ 호남 일도 내에 오십삼주 도라보자/ 제주셔 배를 타고 해남으로 올라올제/ 물 가온대 진도섬엔 모든 곳이 보성이라/ 강진을 건녀셔셔 곡성으로 올나온이/ 흥양에서 도든 날이 일시의 광야하이~" 정익섭 소장의 연대 미상 호남가 첫 구절이다. 사설은 좀 달리했으나 적어도 단가 <호남가>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노래다. 기초가 되는 자료가 '해동유요'이다. 신재효가 정리하기 이전과 이후에도 땅 이름을 소재 삼는 노래가 많이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존재 위백규와 그 아버지의 지명시가 대표적이다. 지명시나 지명가요의 기본적인 성격을 흔히 지명을 패러디한 언어유희로 해석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지명을 통한 지역의 존재 인식, 자기 정체성의 인식으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 존재 위백규가 장흥에 할거한 실학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학을 성찰하고 실사구시의 실천을 지향했던 것이 실학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지역을 지키는 맹주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남시>는, 사천-지례-안동-함창을 엮어서 만들어가고, <호남부>는, 창평-부안-전주-장성을 엮어서 꾸려간다. 앞의 것은 위백규의 아버지 위문덕이 지은 <<남정시>>의 일부다. 태인-정의-흥덕-구례-낙안-장흥-순창-함열 등으로 짰다. 뒤의 것은 <<악부>> 소재 <전라도>편의 일부다. 함열-태인-동복-창평-금구-만경-무장-옥구를 엮어 짰다. 태인, 구례, 장흥, 함열 등 판소리 단가 <호남가>에 근접하는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유행하던 문학 장르이기에 지명가사(地名歌辭)라 한다. 나는 편의상 지명가요(地名歌謠)로 통칭한다. 김석회가 논문에서 소개한 지명가요는 <<해동유요>>에 실려 있는 <호남가>, <호서가>, <영남가>, <<잡가>>에 실려 있는 <호남곡>, <<악부>>에 실려 있는 <호남가>, <경기가>, <관서가>, <팔도가>, <<잡기>>에 실려 있는 <호서별곡> 등이다. <<충청보감>>의 <호서지명부>, <<남원지>>의 <용성표>, <남원표>도 있다. 17세기에 이미 창계 임영(1649~1696)에 의해 호남의 56개 고을 이름을 토대로 한 <남정부>라는 지명시가 지어져 널리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언구 속에 고을 이름이 1개씩 배치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이 전통적인 문학 형식이 차차 실제의 노래로 불렸다고 해석한다. 나는 거꾸로 본다. 저자거리의 지명 노래가 이들에 의해 문학 양식으로 수렴되었다고 본다.

호남가와 쑥대머리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임방울 국창

위백규의 지명시에서 임방울의 단가 <호남가>까지

김석회의 논문 "조선 후기 지명시의 전개와 위백규의 여도시(輿圖詩)"에 지명 관련 시를 자세히 논의했다.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여도시'는 총 5언 320구다. 경기 36구, 호서 38구, 해서 20구, 관서 38구, 관동 22구, 관북 24구, 영남 50구, 호남 48구에 결구 44구를 붙였다. 여도시(輿圖詩) '호남'조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남정시>를 그대로 전재하고 새로운 사설을 덧붙여 만든 것이 <호남가>다. 최승범은 8종의 <호남가>를 말했다. 윤치부는 호남가 8종을 소개했다. 윤여정은 다섯 가지, ①해동유요(海東遊謠) <호남가>, ②악부(樂府) <호남가>③고가요기초(古歌謠記抄) <호남가>, ④정익섭(丁益燮) 소장본 <호남가>, ⑤신재효(申在孝)본 <호남가>를 소개했다. <<해동유요>>(1710)의 <호남가>는 흥덕, 순천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례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55개 고을 이름을 엮어 만든 76구의 가사로 이루어진다. 김석회에 의하면, 마지막 구절에 해당하는 '우리도 성대의 태평안락하오리라' 같은 구절은 시조의 종장 율격을 차용하고 있는 정격 가사의 낙구(落句)와 유사한 형태로 조선 전기로부터 이어오는 양반 가사의 격식을 그대로 습용한 것이라 한다. 또 호남의 54개 지명을 56개 구에 담고 있는 판소리 단가 <호남가>는 55개 지명을 76개 구로 엮고 있는 <<해동유요>>의 <호남가>, 56개 지명을 78개 구에 담고 있는 <<악부>>의 <호남가> 등의 지명가사에 비해서 다소 축약된 형태라고 한다. 17세기 지명시 '남정부'가 18세기 '남정시'로, 이것이 다시 19세기를 거치며 오늘날의 '호남가'로 완숙되었다고 본다는 해석이다. 궁금증이 인다. 그렇다면 남정부 이전에는 지명 관련 노래가 없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네 전통적인 타령에 산견 되는 땅이름, 각설이들이 불렀던 숫자타령 등 그 역사는 훨씬 더 깊고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호남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웅숭깊은 내력을 담고 있다.

남도인문학팁

해남의 지명가요, '이도구경 하자스라'

"이도구경 하자스라/ 낙락장송 느러진 가지~/ 이름좋은 부흥리는 빈자감이 전혀 없네/ 해당화 붉은 꽃은 송현에 비쳐있고/ 좀머리 청년들은 놀러가세 놀러가~/ 정착은 덕송이요 관두울대 세상골이라/ 실농수 농부들아 놀러가세 놀러가/ 돈다리로 놀러가세~" 해남군에서 근자에 발견된 지명 노래다. 지역 내 30여 마을 전체를 노랫말에 담았다. 누군가에 의해 작창된 이 노래는 실제 주민들에 의해 불려졌고 지금도 선율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목포MBC에서 취재차 간다기에 동행하여 내가 인터뷰를 했다. '판소리 단가 형식의 노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불리고 또 확산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해두었다. 그렇다. 자기 지역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작업 속에서 <호남가>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오는 10월 28일 함평 엑스포공원 주제영상관에서 관련 학술회의가 열린다. 나도 한 꼭지 맡아 발표한다. 오늘 얘기는 그 중의 내력 찾기이다. 차제에 한 번 더 판소리 단가 <호남가>를 소개하고, 왜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널리 유행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