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6> "자본주의 물결… 베트남 공동체는 변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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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6> "자본주의 물결… 베트남 공동체는 변화중"
베트남 달랏 마지막 회 - 여러 군상들이 한 눈에, 달랏 야시장
  • 입력 : 2022. 10.06(목) 16:06
  • 편집에디터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베트남은 위도 8도 30분~23도 22분 사이에 위치한다. 기후 특징은 위도상의 차이보다는 고도상의 차이로 남부는 열대몬순기후에, 북부는 아열대기후에 속한다. 이 때문에 남부는 건기(11~4월)와 우기(5~10월)로 나뉘어져 연중 여름인 반면 북부에는 4계절이 있다. 여름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해양풍으로 고온 다습하며, 북부의 겨울은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대륙풍으로 춥고 다습하다. 이로 인해 북부에는 겨울과 봄에 자주 가랑비가 오며 특히 습도가 높아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궂은 날씨와 상관없이 북부는 엄연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의 도시였다. 중국 운남성에서 시작해서 베트남을 관통하는(전체 길이는 1,200km, 베트남 내에서는 475km) 홍강이 있어서였다. 홍강 주변은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수산, 건설, 조선, 교통, 통상 분야까지 발전을 촉진 시켰다. 모든 것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장마철이면 강이 범람해서 생활터전과 목숨을 위협했다.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를 가리켜 '제방을 쌓는 역사'라고 한다. 1년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천 년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왔던 제방 쌓기였다. 자연과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광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다.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광의'는 단일 민족이 아닌 다수 민족의 화합이 함축된 말이다. 1976년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은 54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85%가 '낀(Kinh)' 족이긴 하지만 15%의 소수민족과의 어울림 또한 중요했다. 내부적으로는 소수민족 간에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공동의 적을 놓고는 화합을 이루었다. 이런 화합은 1954년 7월의 제네바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프랑스를 상대로 투쟁하는 힘이 되었으며,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1978년 12월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2월 국경선 1,400km에 걸쳐 남침해 온 중국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았다.

이런 베트남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1992년 처음 수교를 맺으면서 나날이 그 변화를 달리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분야까지 급속히 확대되었다. 1990년 대 말부터 한국 드라마가 베트남에서 인기를 끈 후 영화, 음악 등의 장르로 확산되었다. 최근에는 뷰티, 스포츠, 교육 등 다양한 콘텐츠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베트남인에 대한 인상은 결혼이주여성의 이미지가 앞설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주노동자, 유학생 순이 아닐까 싶다. 이미 지방대학교는 저출산과 수도권 대학 입시생 몰림으로 인한 공백을 유학생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에도 상당수 베트남 유학생이 수학하고 있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대표적으로 결혼이민자 관련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2세대 또한 사회통합의 과제를 안고 있다.

짧은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7월 어느 토요일, 나는 베트남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야시장을 방문했을 때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활성화 되어 있는 시장은 낮에는 한가로워 보이지만 밤이면 그 모습을 달리했다. 우리가 출국하는 날이 베트남 원주민의 여름 휴가시즌 시작과 겹쳐서인지, 토요일 저녁 야시장은 평상시보다 인파가 세 배 가량 많았다.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다른 날과 비교 기준이 없던 우리는 롯데리아에 세워진 그 수많은 오토바이들을 무심히 지나 도로 옆으로 즐비한 로컬 음식점들, 잡화상 등을 구경하며 야시장만의 들뜸으로 마지막 여정을 정리했다. 야외 콘서트도 열렸고 뾰족 모자를 쓰고 긴 장대 양쪽에 줄을 매달아 과일 등을 이동하면서 파는 행상인도 정겹기만 했다. 시장 밖이 유곽지역이라 위험하다는 가이드 말까지 흥미롭게 들렸다. 과일 중에 최고라는 두리안(두리안을 호텔에서 먹을 수는 없다. 냄새가 심해서 냄새가 빠져나가는 기간인 1주일 치 호텔비를 벌금용으로 지불해야 한다)을 발견했을 때는 시장 바닥에서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버스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롯데리아 앞으로 이동했다.

달랏 야시장 풍경. 차노휘

공항으로 데려다 줄 버스는 오지 않고 Police라고 적힌 파란 용달차가 우리 앞에 주차했다. 짐칸에 서 있던 새파란 청년들이 한꺼번에 내리더니 노점상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순간, 좀 전까지 거리를 점령했던 노점상 일부는 도망가기 바빴고, 미처 짐을 챙기지 못한 행상인들은 붙잡히거나 털썩 거리에 주저앉았다. 단속반이 뜨기 전까지 자리다툼을 하며 육탄전까지 벌였던 이들이었다. 한 시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나 또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속현장과 달리 롯데리아 오토바이 주차장 너머는 행복한 여행객들과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뭉쳐서 소음을 만들어냈다. 시간이 더 흘러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단속반들이 우리를 시장에 내려주느라 잠시 정차한 것을 트집 잡아 버스 운전사에게 우리나라 돈으로 2백만 원에 가까운 벌금을 물리고, 면허증까지 압수해버렸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일행들은 불평 반 걱정 반을 하기 시작하였다.

야시장은 여러 군상들의 모습을 내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1975년의 남북통일과 80년 대 초에 있었던 냉전체제의 붕괴는 더 이상 베트남 사회를 과거와 같이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공동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행복에 더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이들의 사고에 사회(정치)가 발맞추어 잘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 욕망들을 억압하는 동시에 정권 유지를 위해서 공권력을 남용하는지, 여전히 베트남 사회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단 공산주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더해졌다. 불확실함에 동요되고 싶지 않아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 볼륨을 높이는 것 말고는 말이다.

차노휘〈소설가, 도보여행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