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 문화재 바로 알기 22>【괘불탱・괘불지주】 ⑤ 법당 앞 좌우에 나란히 세워진 괘불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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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 문화재 바로 알기 22>【괘불탱・괘불지주】 ⑤ 법당 앞 좌우에 나란히 세워진 괘불지주
  • 입력 : 2020. 11.12(목) 10:16
  • 편집에디터

1. 운흥사지 괘불지주 전경 1(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괘불지주와 당간지주에 대한 찬란한 오해

괘불지주는 그 생김새가 당간지주와 비슷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문화재 지표조사'나 '문화재 안내판(무위사)'에서 조차 괘불지주를 당간지주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그 둘은 위치나 개수, 크기, 심지어는 용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당간지주는 절 초입에, 괘불지주는 대웅전 같은 중심불전 앞에 세우는 입지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당간지주는 두 개의 돌기둥인 2점을 1조로 세운 데 비해 괘불지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좌우로 배치하여 모두 4점을 1조로 삼는다. 그 크기도 괘불지주는 사람 허리 높이 정도로 작지만 당간지주는 사람 키보다 더 큰 2m 이상이다. 당간幢竿은 당이나 깃발을 걸었던 장대이고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러한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국기 게양대 같은 모양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신라하대에서부터 고려까지 제작되다가 사라져 버린 불가佛家의 건당建幢풍속이었다.

괘불지주, 괘불대, 괘불궤

괘불은 회화 분야의 연구 대상이지만 괘불지주나 괘불대․괘불궤는 공예 분야의 연구 대상이다. 연구 분야가 나누어진 까닭에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 의미 있는 연구들이 진행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괘불대와 괘불궤 또한 조선 시대 목공예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지만 그 이상의 연구 진척도 더디다. 특히 괘불지주나 괘불궤에는 명칭과 조성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명문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하다.

괘불의 연구가 회화 쪽에서만 진행되다 보니 괘불지주와 괘불대․괘불궤 등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져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간과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괘불탱과 괘불지주 숫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아 아직도 그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운흥사지나 보림사의 괘불지주는 초기 형식

그동안 사찰 불전 앞에서나 절터에 덩그러니 방치된 괘불지주들을 보면서 품었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명문 있는 괘불지주를 통해 기준작을 만들었다. 또 명문이 없더라도 괘불탱의 화기나 괘불궤・사지 등의 기록을 통해 방증 기준작도 확보해 형식분류의 기준 폭을 넓혀보았다. 이러한 기준으로 접근하면 전남 괘불지주 명문 기준작이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나머지 괘불지주의 연대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자료를 만들어 놓고 보니 운흥사지나 보림사의 괘불지주를 보면서 처음부터 들었던 이런저런 감상들이 하나둘 정리되었다. 우선 전남 괘불지주 가운데 이른 양식이라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특히 운흥사지는 죽림사와 거리도 매우 가까워 '죽림사 괘불'의 원 봉안처일 것 같다는 심증도 굳어진다.

폐사된 곳에서 옮겨온 괘불을 모신 사찰은 죽림사와 다보사이다. 운흥사와 죽림사의 거리는 22.7㎞이고 다보사와 '금성산錦城山 보흥사普興寺'로 추정된 '보광사지'(나주시 다시면 신광리 신기마을)까지의 거리는 7.7㎞이다. 모두 공통적으로 거리가 매우 가깝다. 운흥사의 2조(8점)의 괘불지주는 죽림사 괘불탱의 조성연대인 1622년까지 제작연대를 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보림사 대적광전 앞이나 대웅전 앞 괘불지주도 17세기 초・중반경으로 추정된다.

괘불지주 형식분류 시도

이처럼 괘불지주 초기 형식인 운흥사지나 보림사 괘불지주는 암질이 화산암 계통인 '유문암질 용암'으로 제작되었다. 능주・장흥 지역에 분포하는 암석을 이용했으며 암질 특성상 표면이 거칠게 다듬어졌다.

괘불지주 머리 부분은 반월형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월두형(月頭形) 비석과 매우 닮았다. 괘불지주 형식적 특성은 암질과 면석의 연마 정도가 가장 밑바탕이 되며 머리 부분을 월두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서리 어느 곳을 얼마나 어떻게 다듬고 좁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1677년인 도갑사 괘불지주부터 양질의 암석을 사용하게 된다. 머리는 둥그렇지 않고 낮아지며 좌우 옆모서리 경사를 완만하게 처리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일부 화산암 계통의 암석도 일부 등장하지만 대체로 좌우 옆모서리를 다듬는 경사 처리 방법이 약간씩 달라질 뿐이다.

괘불 발생 기념비적 문화재

죽림사 세존괘불탱은 1622년(광해군 14)에 조성된 것으로 비록 보물로밖에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괘불탱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기념비적인 문화재이다. 기록상으로는 '공산동화사사적기'에 의현義玄 스님에 의해 1620년에 조성된(1688년 개채改彩) 동화사괘불탱이 가장 빠르다. 그러한 의미에서 괘불의 시원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동화사괘불탱은 실물에 대한 존재 여부가 사진이나 그림 같은 것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공인받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석가모니의 독존상을 담은 죽림사 괘불탱

죽림사 염화실에 보관된 괘불은 삼베로 제작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비단과 모시를 혼용하여 제작했다. 괘불은 대개가 10여 미터 내외의 대형 그림으로 튼튼한 삼베로 만들지만 죽림사의 경우는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그런지 비단과 모시를 서로 연결해서 제작했다. 물론 얼굴이나 가슴 등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부분은 비단 바탕으로 그렸다. 바탕천은 6폭을 세로로 연결하였다. 중간의 두 폭은 비단(1폭 너비 59㎝)으로 좌우 각 두 폭의 모시보다 넓다.

괘불탱은 괘불궤에 넣을 때 일반적인 두루마리 족자처럼 가로로 돌돌 둥글게 만다. 네 장의 한지를 겹치고 윗면의 비단과의 사이에 테두리를 하여 배접하고 상・하단에는 둥그런 막대를 끼워 말아 감기 쉽게 했다. 비단은 가로 방향으로 여섯 폭을 이어서 감침질하였다. 이 괘불은 화면만의 크기는 길이 437.6㎝, 그림 너비 240.4㎝이나 모서리 여백까지 포함한 실제의 크기는 최대 길이 514㎝, 최대 너비 262㎝이다.

석가모니의 독존상을 담은 죽림사 괘불탱

불탁 위에 놓인 연화대좌에 반가부좌한 모습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마귀를 항복 받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수인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불을 단독상으로 화면 가득히 그렸다. 석가세존의 몸과 머리 뒤에는 커다란 키箕(곡식 등을 까불러서 쭉정이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쓰는 용구)를 둘러쓴 듯 '키형광배箕形光背'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키 모양은 17세기 탱화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광배 모습이다. 강진 무위사 후불벽화인 아미타삼존도(1476)에 보이는 장식적인 키 모양 광배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두광과 신광을 완전히 분리한 점이 변화된 모습이다. 땅을 가리키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벌어진 모습은 보살사・안심사・영수암의 '영산회상도'에서도 보인다.

구름 표현은 상단의 경우 색동 띠 여러 개를 이어 놓아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하다. 하단에는 국화와 모란을 인화문처럼 그렸다. 말아진 머리칼 모양의 나발이 옥계가 오뚝하고 붉은색 농담으로 그린 계주는 이마 사이인 정면에 자리한다. 우직스러운 표정이지만 반달 모양 눈썹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슴츠레한 눈매, 그리고 눈동자와 눈썹까지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코는 얇은 편이고 턱과 코밑의 수염은 나선형으로 처리하였다. 눈썹과 함께 수염은 선명한 초록색으로 그렸는데 역시 17세기 불화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2. 운흥사지 괘불지주 전경 2(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3. 운흥사지 괘불지주 1-1(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4. 운흥사지 괘불지주 1-2(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5. 운흥사지 괘불지주 2-1(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6. 운흥사지 괘불지주 2-2(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7. 보림사 괘불지주 원경(17세기 초・중반, 사진 황호균)

8. 보림사 괘불지주 전경 정면(17세기 초・중반, 사진 황호균)

9. 보림사 괘불지주 전경 측면(17세기 초・중반, 사진 황호균)

10. 무위사 괘불지주 명문(1678년, 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