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맞대어 자라나는 지혜… 공명의 틈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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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맞대어 자라나는 지혜… 공명의 틈을 만들자
439. 키 큰 나무숲, 봄 솟는 소리
  • 입력 : 2025. 03.20(목) 16:25
광양시립국악단 가야금 합주곡 ‘키 큰 나무숲’ 뮤직비디오 스틸컷.
어떤 알곡들이 튀어 오르는 소리일까. 어떤 생명이 땅속을 헤집고 올라오는 진동일까. 파도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치는 풍경일까.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는 상투적 표현만으로는 다 말하기 어려운 청아한 음들의 향연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면, 재잘거리기도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며 새싹 오르는 뒤꼍이며 고샅이며 매화봉우리 터지는 나무 곁을 종종걸음으로 달려 다니는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아니라도 좋다. 어미를 쫓아 장난질하는 강아지들 혹은 고양이어도 무방하다. 통통 뛰어다니는 선율을 따라잡는 앵글이 분주한 것은 현을 뜯는 손가락들이 또한 분주하기 때문이다. 현란한 손가락과 공명하는 현판의 떨림, 무심한 담쟁이넝쿨과 호젓한 골목길이 대조적이어서 오히려 선율이 도드라진다. 카메라의 시선이 소리의 출처만 줄곧 포착하는 게 아니다. 진동하는 상판의 어느 틈, 아마도 그 행간에 있을 나무와 숲과 비와 구름과 아니 무엇보다 새싹과 봄을 주목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지난주 공개된 광양시립국악단 가야금 합주곡 ‘키 큰 나무숲’ 뮤직비디오 얘기다. 감독이자 작곡가인 류형선에게 물었더니 시(詩)로 화답한다.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네” 시인 박노해의 시구(詩句)를 빌어 25현 가야금 넉 대로 쓴 시라는 것이다. 그렇지, 시가 곧 노래이자 음악 아니던가. 중앙 어느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퀄리티이다. 본래 단원들의 실력이 출중해서일 것이지만 구슬이 열 말이라도 꿰는 지도력이 없고서는 내기 어려운 성과다. 합주곡에 관해 심층적인 측면을 물었더니 대중의 보편적 공감이 우선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대중의 검증이 완성된 곡이라는 뜻이다. 2014년 김해시립가야금연주단의 대규모 가야금 합주곡으로 위촉받았던 곡을 2025년 광양시립국악단 가야금 4중주로 재구성해 뮤직비디오로 발표했다. 연주 템포를 빠르게 재편했기에 촘촘하고 민첩하고 역동적인 곡이 됐다. 선율에 스민 봄과 새싹, 큰키나무숲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상상했던 이유가 있다. 총 3악장 구성, 7분 40초에 이른다. 1악장은 시작할 때부터 선율을 던지고 받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어서 마치 쫑알쫑알 질문하고 대답하는 풍경을 자아낸다. 이를 대위적 앙상블이라고 한다. 하나의 지속음이 각 파트 앙상블의 대위적 진행에 매개역할을 하도록 배치했다. 2악장은 템포를 뚝 떨어뜨려 고즈넉한 서정을 자아내는 악상으로 구성했다. 외롭고 눅눅하고 높고 쓸쓸한 감수성을 주제 선율 삼았으므로 나직이 따라 읊조려도 좋을 대목이다. 3악장은 시작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하듯 진행한다. 큰키나무숲을 산책하는 듯한 상쾌한 풍경이다. 발랄한 주제 선율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템포를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노스탤지어를 행간의 어디쯤 숨겨뒀다는 뜻이다. 심상의 앵글을 좇아 이 느낌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장차 가야금 12~16대 정도의 대규모 편성으로 이 템포를 포획하는 연주를 리메이크한다. 큰키나무숲의 우듬지와 어깨 겯을 성과를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광양시립국악단 키큰나무숲 연주단.
나무숲의 아포리즘, 키 큰 나무숲을 걸으니 내 키가 커졌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울었다/ 내가 너무 작아서, 내가 너무 약해서/ 키 큰 나무숲은 깊고 험한 길이어서/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웃었다/ 내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고귀한 내가 있었기에/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알았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어온 사람이/ 키 큰 나무숲을 이루어간다는 걸/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내 키가 커졌다.” 박노해 사진 에세이 ‘길’에 수록된 시이다. 류형선 감독이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가야금 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나무숲의 아포리즘(aphorism) 때문이다. 아포리즘은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 격언, 금언, 잠언 따위를 말한다. 작가의 말에서 키 큰 나무숲 같은 어른이 절박하게 그립다고 했다. 그래서 내놓은 답이 누군가의 키 큰 나무숲으로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가야금 협주곡이 이 알아차림의 결과물인 셈이다. 박노해의 말대로 아니 류형선의 말대로 키 큰 나무숲을 걸으면 나무처럼 키가 커지는 것일까? 생각난 김에 광양 백운산자연휴양림에 가서 편백 나무들 하늘 닿게 자란 숲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숲길만 걸으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가지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보인다. 둥치의 굵기와 상관없이 나무들의 키가 비슷하다. 먼저 자란 나무들이 제 팔만 넓게 벌리고 키 높게 자라, 나중 자란 나무에게 햇빛 받을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박노해의 시처럼 ‘내가 너무 작아서, 내가 너무 약해서’ 나중 자라는 나무들은 고사하고 만다. 그래서 이네들이 마련한 공생의 법칙이 서로의 키를 비슷하게 하는 것이다. 나무둥치가 넓고 좁은 것에 상관없이 서로의 우듬지를 맞대고 자라는 이유가 바로 더불어 살아가기이다. 큰키나무숲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다. 나무 의사 우종영은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메이븐,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봄 집 근처 북한산을 오르다 꽤 깊은 산중에서 어린 아까시를 발견한 적이 있다. 큰키나무들이 자리한 산 중턱에서 아까시가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큰 나무들 사이에 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서너 평 남짓 되는 숲의 틈, 그곳은 주변을 둘러싼 큰 나무들 덕에 계절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한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주변 나무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마치 온실 안처럼 어린 생명이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다. 숲에 틈이 있어서 어린나무, 새로운 희망이 자라는 것이다.” 이게 어디 나무와 숲에만 해당하는 얘기겠는가. 박노해와 류형선의 나무숲 아포리즘처럼 공생하고 공명할 틈을 만드는 마음이야말로 키 큰 나무숲을 걷는 지혜 아니겠는가. 광양시립국악단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공연단체에 비유할 만한 풍경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봄이 깊어지면 이어폰 하나 끼고 가야금 4중주 곡을 들으며 백운산휴양림 편백나무숲길을 걸어봐도 좋겠다.

광양시립국악단 키큰나무숲 연주단.
남도인문학팁

창작국악의 거점 광양시립국악단과 류형선 감독

광양시립국악단은 2010년 7월 광양시 소속 예술단으로 출발했다. 국악관현악, 판소리, 연희, 공연기획 등 40명의 전문 예인들이 소속돼 있다. 공연 환경은 전국의 지자체 소속 공연단들과 비슷하다. 2024년 4월 전남도립국악단 예술감독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류형선 감독의 채근으로 25현 가야금 합주곡 준비를 했고, 첫 번째 뮤직비디오를 출시하게 됐다. 8개월에 걸쳐 완성한 단원들의 긴밀하고 촘촘한 연주력이 돋보인다. 고무적인 것은 그간의 행사 진행 위주의 패턴에서 벗어나 ‘창작국악의 거점 국악단’으로 발돋움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데 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기도 한 이 작품은 마른 논에 물 스미듯 통통 튀는 가락이 배어 나오는 작품이다. 대중적 확장성을 두루 갖춘 곡으로 검증돼 있기도 하다. 이번에는 가야금 단원인 구슬아, 임영대, 안민영, 이정미가 참여했다. ‘연리지미디어’의 영상연출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오는 4월 초에는 두 번째 뮤직비디오 ‘관악합주와 거문고 돋을새김-용서하고픈 기억’의 발표가 예정돼 있다. 전남도립국악단에서 이룬 성과 못지않게 광양시립국악단을 창작국악의 거점으로 키워내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역 공연단체의 생존은 물론 성과를 지역사회에 피드백시키기 위한 구조이기도 하다. 관련 정책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마련하겠다. 키 큰 나무숲을 돌아 나와 그만큼 키가 커진 단원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