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2011년 튀니지에서의 투표 독려 옥외광고와 설명글. |
한국과 같은 정치 격변을 겪지 않은 미국에서는 1933년부터 대통령 선거 다음 해의 1월20일, 혹시 그날이 일요일이면 1월21일로 대통령 취임식 날짜를 고정해 지키고 있다. 올해 두 번째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도 역시 1월20일이었다. 실시간 TV로 시청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1989년의 아버지 조지 부시가 처음이었다. 전체적 느낌이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보다 자리를 떠나는 이의 행사가 더욱 화려했다. 떠나는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배우로 원래 유명하게 된 이의 밑에서 8년을 버틴 그 자리에 올라간 조지 부시에게 앞선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선임 대통령의 치적을 기리는 특별 TV 프로그램들이 연달아 나왔다. 그 중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짙고 큰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 어린이에게 레이건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자 이런 대답을 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어요. 사실 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대통령이었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그랬다. 고등학생으로 맞이한 ‘대통령 유고’라는 글자에 굳이 이름을 쓸 이유가 없었다. 대통령은 내 또래가 그 단어를 알기 시작한 이래 오로지 그 한 사람이었다. 1961년부터 따져서 유고 사태가 날 때까지 ‘18년’이었다. 유고 발표가 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8년 독재’라고 자연스럽게 수식어가 붙었다. 이전에 역시 ‘장기 독재’라는 표현을 쓴 리승만의 경우 대통령직을 수행한 기간만 보면 12년이었다. 지금이야 세계 다른 나라까지 포함하여 10년 이상 국가원수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2010년으로만 거슬러 가도 20년 이상이 수두룩했다. 그들 장기 집권이 새삼스레 부각된 게 2011년 정점을 찍은 이른바 ‘아랍의 봄’과 함께 였다.
북아프리카 지중해변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 나라의 독재자들이 2011년에 물러났다. 1987년 쿠데타를 일으키며 집권한 튀니지의 벤 알리, 1981년 전임이 반란세력의 총탄으로 살해되며 부통령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무바라크, 1969년 권좌에 올라 미국의 폭격까지 견뎌낸 한국에서도 잘 알려졌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바로 그들이었다. 소셜미디어의 발달이 국민의 저항 불길을 타오르게 하고, 집권 기간만 합쳐서 100년에 가까운 세 독재자를 끌어내렸다고 평가한다. 이른바 ‘재스민 혁명’이었다.
최초로 대규모 민중 시위가 일어난 건 튀니지였다. 분신 사망자가 나오고 수십 만 군중 시위 속에서도 벤 알리는 버티었다. 결정타를 날린 건 군부였다. 독재자 벤 알리의 명령을 따르기를 군부가 거절했다. 군부마저 등을 돌리며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가고, 선거가 실시되었다.
벤 알리의 망명으로 민주화가 완성되었다고 튀니지 사람들이 생각했나 보다. 새로운 지도자를 뽑기 위한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이들이 55% 정도에 머물렀다. 정권이야 그냥 바뀌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20년 이상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아성을 구축한 독재자들에 기생했던 세력들의 힘이 생각보다 컸다. 전체적으로 낮은 투표율에서는 자신들의 권력을 뺏길까 두려워하는 독재 권력의 찌꺼기들이 자신들끼리 뭉치고, 무지한 세력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잡을 수도 있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선거가 예정된 2011년 10월23일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벤 알리가 튀니지 도시의 상징적인 건물 벽면을 가득 채우며 나타났다. 독재자의 뻔뻔한 얼굴 표정을 담은 옥외 포스터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포스터를 가리키며 항의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후 독재자의 초상을 담은 포스터가 떼어지면서 그 뒤에 문구가 나타났다.
‘정신 차리세요. 독재자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10월23일에 투표하세요.’
확실한 효과를 거둔 옥외광고였다. 광고를 실시하기 이전의 투표 참가 의향 55%를 훨씬 넘어 88%의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 광고는 세계적 광고제에서 두루 수상하며, 튀니지의 광고 창의 역량까지 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높아진 투표율 이상의 의미 있는 결과도 나왔다.
앞서 언급한 2011년에 20년 이상 집권했던 독재자들을 내쫓았던 이수 리비아와 이집트의 사정이 기대처럼 평화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카다피가 물러난 리비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내전이 일어났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2차 내전의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언제 다시 살상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카다피 시절에는 민중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지는 않았다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섰다가 군사독재정권으로 바뀌었다. 혁명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 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안정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처음 아랍의 봄이 촉발되었다고 한 튀니지였다. 튀니지에서는 원활하게 선거가 행해졌다. 거기에 광고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2011년의 광고 효과가 세월이 지나며 사라졌는지 튀니지의 앞날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2019년에 당선된 대통령이 한국에서 1970년대에 횡행했던 ‘긴급조치’와 유사한 ‘명령통치’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작년 2024년 10월에는 자신에 대항하는 후보들을 실격 시키면서 당선되었다. 부정이 극심한 가운데 득표율은 90%에 이른다지만, 전체 투표율은 30%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적법한 대통령이라고 자랑한다. 그나마 몇 차례 선거가 격식을 갖춰서 행해지는 데는 광고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고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 시스템의 정비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따라야 한다.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