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디 코벳 감독 ‘브루탈리스트’ 포스터.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
![]() 브레디 코벳 감독 ‘브루탈리스트’.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
라즐로 토트(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독일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헝가리의 천재 건축가다. 유대인인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전쟁이 끝난 1947년 미국 땅을 밟게 된다. 하늘을 쳐다보자 그의 눈에 들어온 삐딱한 각도의 자유의 여신상.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민자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 펜실베이니아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는 사촌의 고객 해리(배우 조 앨윈)로부터 아버지의 서재를 리노베이션 해 달라는 주문이 종래에는 그의 입지를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재력가인 해리의 아버지 해리슨 뷰런(배우 가이 피어스)이 서재에 대한 외부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자 라즐로를 인정하기 시작함으로써 라즐로는 해리슨이 제안한 거대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해리슨의 지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아내 에르제베트(배우 펠리시티 존스)와 부모 잃은 누나의 딸 조피아(배우 래피 캐시디)를 미국으로 데려오게 된 기쁨도 누린다. 그러나 그는 궁핍과 헤로인 중독, 여러 트라우마로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유일한 삶의 본능은 건축을 통해 그의 철학과 브루탈리즘을 실현하는 일. 아내가 이스라엘로 건너간 조카 조피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씌어져 있다. ‘그이는 건축에 몰입하는 정도가 미칠 듯 지나쳐서 마치 건축을 통해 자신의 제단을 쌓는 것 같아.’라즐로가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수용소 생활, 밑바닥 노동자로부터 건축가로서 본인의 저력을 발휘하기까지 그리고 자본의 혹독함에 휘둘려 심신이 바닥을 치는 과정에서도 그에게는 변함없이 붙잡을 한 가닥의 줄이 있었다. 매순간 역사적 운명이 비극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그에게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예술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건축이었다. 격동의 시대가 흘러가더라도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건축물의 힘이었다.
영화를 감상하다 놀란 사실, 3시간 45분의 러닝 타임 중간에 15분의 인터미션이 있었다. 화장실 이용이나 휴대폰 확인에는 유용했지만 아무런 간식거리를 준비 못해서 황당했던 시간이었다. 각본까지 쓴 젊은 감독의 뚝심 있는 러닝 타임인가 싶어 또 다른 실험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역시나 건축물을 조망하는 촬영을 위해 비스타 비전 카메라로 촬영을 했고 70㎜ 필름으로 아이맥스 상영용으로 만든 감독의 야망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젊은 야욕이 아니었다. 아역배우로부터 출발한 배우 출신 브레디 코벳 감독의 영화계 경력이 그리 짧다 말할 수 없어서다. 그는 10년 동안 숙성시킨 자신의 시나리오로 ‘더 차일드후드 오브 어 리더’(2015)를 제작, 베니스영화제에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데뷔작이 수상으로 이어진 것은 그의 잠재력을 입증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장편인 ‘브루탈리스트’ 기획과 시나리오를 위해 그는 건축가 집안인 자신의 가족 이력을 십분 활용했다. 물론, 다른 건축가들의 비판도 따랐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마르셀 브로이어(1902~1981)의 이력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 고독한 천재 예술가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르셀 브로이어 교수는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을 건축한 브루탈리즘의 거장이다.
오늘날에는 브루탈리즘이 명소 건축물인 경우가 많다. 그 흔적은 건축가 안도 다다오, 이타미 준 그리고 수상을 한 국내 건축물(제주의 본태박물관·방주교회·수풍석박물관, 천호성지 부활성당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상의 시대극을 통해 여러 겹의 층위들을 복합적으로 결합시킨 감독이 전하려 했던 가장 두드러진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야만성이지 않나 싶다. 필자가 미국에 머무르던 동안에도 금세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라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여운이 이어지리라 싶다. 혹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폐쇄적 이민정책에 대한 반기라고도 평가한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