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방마을 앞 담양천변. 바람 차가운 겨울이지만 하늘 맑고 파랗다. |
국수 한 그릇과 삶은 달걀이 주는 포만감을 안고 천변 둔치에 섰다. 관방제림으로 이어지는 천변 풍경이 넉넉하다. 천변을 따라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다. 어르신들 파크골프장도 저만치 보인다.
천변은 영산강 상류 관방천이다. 담양읍내를 가로질러 ‘담양천’으로도 불린다. 둔치가 관방제(官防堤), 둔치 숲이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관방제림은 1648년 담양부사 성이성이 조성했다. 물난리를 막으려고 예산을 들여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이 숲이 마을을 지켜줬다. 방풍림이다. 여름날엔 더위를 피할 쉼터를 제공한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여행객도 불러들인다. 풍치림이다.
천변은 오래전 객사, 관아가 있던 자리다. 죽물시장과 우시장도 있었다. 잔칫날이면 놀이패가 자리를 잡고, 씨름판도 벌어졌다. 사람들 발길이 줄을 이었다. 시장을 찾은 사람들 끼니를 해결해 준 먹을거리가 국수였다.
둔치를 따라 마을이 들어섰다. 뚝방마을이다. 뚝방은 둔치의 지역말이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천변리에 속한다.
마을 담장에 그려진 벽화 ‘죽물시장으로 가는 사람들’. 벽화는 60∼70년대 마을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모두 1960~70년대 마을과 주민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벽화가 마을 역사와 이야기를 떠올려 준다.
벽화는 5년 전 마을사업 때 그렸다. 오일장과 국수거리를 연계시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자는 속내다. 관광객 발길을 유혹하는 데도 보탬 될 것으로 봤다. 정미소의 복합문화공간 변신도 그때 이뤄졌다. 방아를 찧는데 필요한 시설을 그대로 두고, 다방으로 꾸몄다. 이름도 ‘정미다방’이다.
정미소는 옛날 읍내에 하나뿐이었다. 말과 소가 끄는 수레가 정미소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정미소를 중심으로 공장, 대장간, 상엿집이 모여 있었다. 부녀자들 사랑방인 공동우물도 여기에 있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진 옛 정미소. 한때 다방으로 운영되다가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
‘우리마을 한천석 씨네 천원상회에 첨으로 텔레비전이 들왔어/ 저녁마다 대여섯 명씩 국수랑 막걸리랑 갈아주고/ 텔레비전을 볼라고 모였어. 거그가 마을 사랑방이였제’
벽화로 만난 ‘천원상회 텔레비전’이다. 마을주민 김남례 씨의 글이다.
천원상회는 우시장 주막이었다. 술과 국밥, 국수를 팔았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크고작은 일을 논하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이후 천원상회로 바뀌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계획된 곳도 여기였다. 3월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조선을 학, 일본을 황새에 비유한 격문도 내걸렸다. 일본경찰에 사전 발각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정기환 등 9명이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담양 만세운동은 이듬해 1월 창평에서 다시 일어났다.
천변 뚝방마을은 물난리를 피할 수 없었다. 운명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냇물이 넘치고, 고샅은 냇가로 변했다. 물에는 똥이 둥~둥 떠다녔다. 인분은 물론 소똥, 개똥이 넘실댔다. 지세가 배 형국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집집마다 정화조가 설치되지 않은 시절 얘기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인상. 할머니와 할아버지 석인이 가까이서 마주 보고 있다. |
돌로 다듬은 석인(石人)은 가분수다. 키 60~70㎝로 작고, 얼굴이 몸의 절반을 차지한다. 코와 입, 눈과 귀가 선명하다. 얼굴 가득 엷은 웃음을 짓고 있다. 그것도 2기가 가까이서 마주 보고 있다.
오른쪽이 할아버지다. 머리에 지체 높은 사람의 상징인 원유관(遠遺冠)을 쓰고 있다. 두꺼운 입술과 코가 도드라지고, 눈은 움푹 패어있다. 턱 밑에 수염은 역삼각으로 길게 내려왔다. 할머니는 머리에 탕건을 썼다. 상대적으로 눈과 코, 입이 많이 닳았다. 석인은 모두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석인상은 1838년 담양부사 홍기섭이 세웠다고 전한다. 배 모양 지세를 감안해 뱃사공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지리를 믿었다. 마을사람들이 석인상을 ‘뱃사공’이라 부르는 연유다.
석인상은 장승 역할을 했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석인상에 제사를 지냈다. 1984년 전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