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로 일대에서 비상계엄대응을 위한 전국 대학 총학생회 공동행동 주최 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규탄 및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
어머니께서 1980년 5월의 비극 이후 안절부절하시다가 추석 이후에 겨우 시간을 내서 외할머니와 이모를 보러 광주에 다녀오셨다. 집에 돌아오셔서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며 위의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모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함께 버티어 보자’고 말씀하셨다는데 어리둥절했다. 당시까지 정부 발표로 ‘폭동’이라고 내가 인식하고 있던 상황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나 달랐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고등학생으로 대학생들의 시위도 구경하고,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한밤에 집에 들어오던 대학 신입생 누나도 보았으나,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알지도 못했다. 한 친구가 자기 동네의 고등학생 하나가 광주의 시위대에 합류하러 갔다는 소식에 치기어린 부러움이 담긴 탄성을 몇몇과 함께 내지르기도 했다. 나중에 광주로 갔다는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누구인지, 정말 그런 일이 났는지, 그저 소문이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갔다.
같은 학교를 다니던 친구 하나는 이발소에 가서 만난 다른 학교 다니는 애에게 ‘우리는 곧 두발 자유화 요구할 거다’라는 소리를 했다. 그가 학생 데모를 꾸미고 있다고 누가 신고를 했는지 모처에 끌려가고, 기관원이 학교까지 들이닥쳐서 그와 친한 애들을 하나씩 불러 조사를 하기도 했다. 계엄포고령 위반이라고 했다. 이후 같은 반의 껄렁대던 친구 하나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머리를 빡빡 깎은 채 햇볕에 탔는지, 부은 건지 벌건 얼굴로 돌아왔다. 온 교실을 들썩거리게 하며 떠들던 친구가 넋을 잃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수업 끝날 때 맞춰 학교까지 데리러 온 그의 어머니를 따라 등교했던 가방 그대로 가지고 집에 가곤 했다. 한참 나중에 그 친구가 삼청교육대에 끌려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시간이 지나 학교에 삼청교육대에 몇 명을 무조건 보내라고 할당이 내려왔다는 말도 들었다.
이번 느닷없는 계엄 선포 후에 만난 선배가 1980년 5월 18일 이른 아침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줬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니던 선배가 있었다. 토요일까지 수업을 하던 시절인지라, 그 교사는 토요일 오후에 아예 학교 연구실로 와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새벽녘에 기지개도 켜고 체조도 할 겸 연구실이 있던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공수부대원들이 눈에 띄었다. 하필 그 교사가 군생활을 공수부대에서 했다. 무슨 연유로 들어온 지 생각도 못하고, 군대 후배를 본 반가움에 그 형이 공수부대원들을 불렀다. 인사를 건네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공수부대원들이 그 선배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폭행을 가했고, 거기서 기절하고 한참 후에야 병원에 실려 갔다. 그 충격으로 학업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교사직도 그만 두고, 정신병원으로 가서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박물관 수장고에나 있을 법한 계엄이 현실로 다가오며 1980년 5월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꾹꾹 눌러두고 있던 것들을 꺼내어 서로 나누기도 했다. 그런 야만의 폭력이 판을 치던 시절의 아픔과 죽음에까지 이른 상처들이 광주와 떨어져 있던 많은 이들에게도 너무나 선연하여, 계엄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그런데 그 단어를 가져다 ‘탄핵 트라우마’라는 말로 같은 무게인양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눈에 든 티끌이 상대의 눈에 박힌 들보보다 더욱 위중하고 고통스럽다고 소리친다. 그들은 공감이란 자신의 새털 같은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기쁨에 발맞추는 경우만 작동한다고 여긴다. 타인의 아픔이란 능력이 부족한 탓이고, 그게 세상사의 이치라며, 아픔에 모멸감까지 들이붓는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녀…어허,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니껴.”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포수라는 요기 베라의 맞는 듯 틀리는 듯 뱉는 말을 의미하는 ‘요기즘’ 중 가장 유명한 표현을 계엄령 다음 날 아침에 들었다. 거의 모든 이들에게 그렇듯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표현처럼 나온 계엄령이었다. 선포 방송 이후 숨 가쁘게 진행되는 상황을 보다 새벽 3시경에야 겨우 침대에 들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선포 당사자가 국회의 해제 결의를 수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숨 돌리며 안심이 좀 되었지만 목욕을 해야 그래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겠다 싶어서 스포츠센터 사우나에 목욕만 하러 갔다. 센터 건물로 들어서는데, 한 양반이 비웃음인지 득의만만한 웃음인지, 헷갈리거나 기묘하게 합쳐진 표정으로 전화에 대고 같은 소리를 두 번이나 연달아 하며 나오고 있었다.
요기즘 표현이 대개 그러하듯 두 가지 상반된 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계엄 선포했던 이가 해제한다고 말했지만, 어떤 짓을 또 할 지 모르니까 안심할 계제는 아니다. 계속 정신 똑바로 차리고 철저히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으라.
둘째, 어쩌다가 일단 물러났지만 다시 계엄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으니까, 낙담하지 말고 다시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
투표조차 하지 못한 첫 번째 탄핵 발의 이후,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다시 시도하여 겨우겨우 가결선을 네 표 넘겨 직무정지를 이끌어냈다. 요기 베라의 표현을 쓴 이가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첫째에서 언급한 감시의 눈이 희미해질 때, 둘째의 뒤집기 기회를 실행에 옮기려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암약’하는 이들이 ‘괴물’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또 말없이 눈물을 훔치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