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장흥의 숨은 인물들: 백광홍과 위백규의 업적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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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장흥의 숨은 인물들: 백광홍과 위백규의 업적과 유산
●장흥 방촌마을
위백규와 백광홍의 발자취 남아
백광홍 '관서별곡' 정철에 영향
실학자 위백규 사회 모순 지적
최초 세계지리서 '환영지' 저술
  • 입력 : 2024. 06.27(목) 15:25
  •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존재고택과 천관산. 고택 뒤란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죽헌고택 안채와 감나무 고목. 고택을 더욱 정겨운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존재고택. 연못이 대문 밖에 만들어져 있다.
‘기행가사(紀行歌辭)’ 하면 송강 정철이 떠오른다. 실학의 상징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 먼저 생각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선입견이다. 기봉 백광홍과 존재 위백규가 있다.

백광홍(1522∼1556)은 정철보다 앞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가사문학의 첫 작품이다. 〈관서별곡〉은 왕명을 받은 백광홍이 관서지방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도착해서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여정과 심정을 그렸다. 25년 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큰 영향을 줬다. 백광홍은 열 손가락에 꼽히는 조선시대 문장가다.

위백규(1727∼1798)는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다. 일찍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700년대에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는 ‘힘 있는 부자가 더 많이 갖고 사치를 하며,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고 직격했다. 하여, ‘부자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부자에게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한테는 잡다한 세금을 면제하고, 자력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외쳤다.

위백규는 ‘향촌이 인사와 재정을 담당하고, 관리의 숫자는 줄이고, 세금을 자율 부과·징수하고, 향촌 방위를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 우리가 도입한 지방자치와 자치경찰제를 200여 년 앞서 주장한 것이다.

위백규는 천문과 지리도 통달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훨씬 앞선 1770년 ‘환영지’를 펴냈다. 환영지는 우리나라 최초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다. ‘지제지(支提志)’도 냈다. 지제(支提)는 천관산의 옛 이름이다. 책에는 천관산의 역사는 물론 계곡과 암자,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보다도 앞서 생각하고 진취적인 위백규였다. 큰 맥락에서 정약용의 사상과 궤를 같이하지만, 그보다 35년 먼저 났다. 신유박해로 정약용이 유배길에 오를 때, 위백규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위백규는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의 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백광홍과 위백규가 나고 자란 고을이 장흥이다. 길게 흥할 장흥(長興)이 배출한 많은 문인과 학자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서도 방촌마을은 존재 위백규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방촌마을은 옛 장흥의 가온누리였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속한다.

장흥읍과 관산읍에 위백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흥엔 앉은 모습, 관산엔 서 있는 모양이다. 생가도 방촌마을에 남아있다. 장흥위씨 웅천공파의 종갓집이다. 이름도 ‘존재고택’으로 붙여져 있다.

존재고택은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풍수지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판과 풍광 빼어난 천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관산 바위들의 동창회를 고택 마루에서 바라본다. 집도 높은 기단 위에 지어졌다. 서쪽으로 안채가 있고, 안채 앞에 정자 형태의 서재가 들어섰다. 서재의 받침돌과 나무 기둥이 300년 전 그대로다. 안채의 굴뚝 벽을 기와로 층층이 쌓은 것도 색다르다.

대개 부잣집 고택은 마당이 넓다. 거두고, 말리고, 쌓아둘 농작물이 많기 때문이다. 존재고택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위백규의 비판의식이 남달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경야독했어요. 백성을 착취하는 벼슬아치의 부패상도 직접 보고, 사회 모순도 체험했겠죠. 그걸 지적한 분이 존재였습니다. 정책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어요. 일상에서 보고 듣고 체험했으니, 가능했겠죠.”

마을에서 만난 위성록 관산파출소장의 말이다. 방촌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에서의 경찰생활 31년을 뒤로 하고 내려왔다. 고향과 사람이 품은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존재고택에서 가까운 데에 죽헌고택도 있다.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멋스럽다. 안채 옆 감나무 고목도 정겹다. 햇볕을 가리고 들이치는 비를 막으려고 처마를 덧붙인 사랑채도 애틋하다. 뜰에 정원과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사랑채에는 한말 의병장 송사 기우만 등 여러 문인의 글귀가 걸려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을 쌓아 생활을 구분한 것도 눈에 띈다. 철따라 빛깔이 바뀌는 들판과 천관산 풍경도 담 너머로 들어온다. 차경(借景)의 진수를 보여주는 자연산 액자다.

사랑채는 죽헌 위계창(1861∼1943)이, 안채는 그의 아들 계은 위대량(1884∼1951)이 지었다. 지금은 죽헌의 증손 위성룡이 소유하고 있다. 위성룡은 경제기획원에서 오래 근무하고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한국보증보험 초대 사장 등을 지냈다.

옛 회주목(懷州牧)의 관아 터에 지어진 죽암고택도 있다. 판서공파 종택으로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300여 년 전에 지어진 사당을 비롯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채 등으로 이뤄져 있다. 판서공 위덕화(1551~1598) 이후 지금껏 양자 없이 혈손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다. 말을 타고 내릴 때 쓰인 하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뒤란의 철륭단지도 발길을 붙잡는다. 볍씨를 담아 집터를 관장하는 신에 바치고 있다.

방촌(傍村)마을은 장흥위씨(長興魏氏)가 터를 잡고 수백 년 살아온 자작일촌이다. 내동, 계춘, 신기, 호동, 탑동, 호산, 산저 등 작은 마을이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다. 지금은 120여 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다. 별신제, 산신제 등 세시(歲時)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마을 이야기와 함께 장흥위씨의 고문서와 목판, 문집 등이 전시돼 있다. 주민들의 자긍심이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서 있는 석장승도 귀한 유물이다. 소나무 숲에 지석묘 수십 기도 모여 있다. 위백규를 주벽으로 배향하고 있는 다산사(茶山祠)도 소중한 공간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