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18 당시 태봉마을 주민이었던 윤다현씨가 최근 해남군 현산면 자택 한쪽에 걸린 5·18민주화운동 사진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정상아 기자 |
80년 5·18 당시 광주 동구 태봉마을 주민이었던 윤다현씨가 최근 해남군 현산면 자택에서 5·18민주화운동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상아 기자 |
●주민 절반이 함께한 지역방위군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인이 검문을 핑계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폭행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고향인 해남의 작은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는 윤다현씨는 44년이 지났음에도 80년 오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집 한쪽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윤씨는 항쟁 직후 계엄당국의 표적이 된 주민들의 거짓 증언으로 붙잡힌 이들 중 한 명이다.
1951년생으로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 동구 태봉마을에서 자란 윤씨는 1980년 경기도 부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해남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내려온 그는 광주에 잠시 들렀다가 5·18민주화운동을 마주했다. 군대를 막 제대했던 그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고 격분해 시민군으로 참여하게 됐다.
“시내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검문한답시고 무차별적 구타를 일삼는 광경을 봤다”며 “국가를 지키라고 만든 군인들이, 더구나 특수부대가 시민들에게 무차별한 행동을 저지른 것은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어 친구들과 시위에 참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내에서 돌아온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모아 지역방위군을 편성해 투쟁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윤씨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해 ‘서울 형님’으로 불렸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차량 운전이 가능했던 윤씨는 시민군이 나주·화순 등지에서 무기를 가져오기로 결정하자 운전을 자처했다. 군용 트럭에 청년들을 태워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동해 무기를 챙겨 시민군이 있던 태봉마을 배고픈 다리로 옮겼다.
이후 윤씨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부상자와 시신을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윤씨는 “시신을 싣고 전남대 병원이나 조선대병원 영안실에 가면 둘 데가 없었고 병원에 입원하려고 해도 사람이 너무 많아 입구에 부상자들을 내려놓고 돌아왔던 게 기억난다”며 “손발이 떨리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반드시 해야 됐다”고 말했다.
23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총기회수 결정에 따라 윤씨는 동네에 돌아다니던 총기를 회수해서 도청에 반납하며 지역방위군 활동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했다.
윤다현 당시 태봉마을 주민의 해남군 자택 한쪽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이 걸려있다. 정상아 기자 |
윤씨는 “주민 70명 정도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그중 50명이 고문에 못 이겨 서울에서 내려온 내가 주동자라고 거짓 증언을 했다”며 “천하장사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고문을 하면 딱 5초만 지나도 숨이 넘어간다. 내가 차를 몰고 다녔고 타지에서 왔으니까 당연히 기억에 많이 남았을 것이다”며 주민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살인, 강도, 내란음모죄로 1차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해서 1년을 복역하고 석방됐다.
이후 그는 서울에 올라가 누나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생활하다 1985년 다시 태봉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윤씨는 5·18구속부상자회 광주동구지회장으로 18년 동안 활동하며 마을공동체 활성화사업에 참여하는 등 태봉마을의 투쟁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윤씨는 “태봉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계엄군에 맞서 나섰던 항쟁 중심지인데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여전히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위해 치유와 마을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필 동신대학교 교수가 최근 광주 서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상아 기자 |
광주 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상필 동신대 교수는 광주의 평범한 시민으로서 5·18민주화운동을 마주했다고 말했다. 스님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태봉마을 한 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아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한 어머니의 애원에 대학교를 가지도, 집밖에 나서지도 못한 채 그저 밖에서 들려오는 군화 소리와 총격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이 교수는 “산으로 몰려온 계엄군으로 인해 매일을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들었다”며 “아직도 귓가에 들렸던 계엄군의 군화 소리가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이 교수는 “항상 절에 자주 드나들던 주민들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됐다”며 “날이 밝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큰 대야에 주먹밥을 잔뜩 쟁여 시민군에게 나눠주러 갔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친밀했던 주민들과의 관계는 항쟁 이후 서먹해졌다. 진압 당일인 27일부터 수사관들이 몰려와 마을 주민들을 끌고가 고문해 추궁했고, 그 과정에서 거짓 증언이 이어졌다.
이 교수는 “태봉마을은 작은 시골마을이라 주민들이 전부 순수하고 친했다”며 “거짓 증언으로 한바탕 마을이 뒤집어진 후에는 다들 서먹해지고 갈등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주민들 중에는 6·25전쟁을 겪은 분들도 많아 진실을 밝히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며 “아직 태봉마을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계엄군이 지났던 자리를 ‘군화 소리 길’로 조성해 조명받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글·사진=정상아 기자 sanga.je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