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색가인 백작을 골탕먹이는 내용의 모짜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 장면. |
18세기 이전까지 여전히 오페라는 영웅을 찬미하거나 신화의 내용을 중심으로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다루곤 했다. 오페라의 제작은 당시 사회 규모에 비해 많은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왕족과 귀족 등 지배계급의 전유물로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공연이 제작되었다. 결혼식 등 기념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를 본 일반 민중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공연 무대예술에 환호하였으며, 이 광경을 지켜본 일부 재력가들은 극장을 건립하고 오페라를 상업화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에 베네치아에 처음 건립된 민간 오페라극장은 대성공을 거두며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오페라극장 건립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제 오페라를 소비하는 주체가 일반 시민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진지한 내용 중심의 오페라를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고 지칭하는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오페라는 영웅을 묘사하는 주인공에게 큰 비중을 두었고, 비루투오적인 기교 중심의 창법의 오페라는 오로지 무대의 화려함만이 난무하는 ‘허장허세’의 오페라 시대였다. 멋진 카스트라토를 중심으로 한 가수들의 화려하고 초현실적인 연주에 매료된 관객들은 처음에는 찬사를 보냈으나, 변화 없이 가수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이러한 스타일의 오페라는 점차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획일적인 오페라에 대항하여 이제 오페라의 소비 주체로 성장한 시민을 대상으로 현실적이면서 서민적인 내용을 매우 익살스럽게 전개하는 ‘오페라 부파(Opera Buffa)’가 등장한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한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
오페라 부파라는 형식은 등장인물의 노래와 연기, 대사처리 등에서 이탈리아의 16세기 즉흥극 콤메디아 델 라르떼(Commedia dell‘arte)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콤메디아(희극)와 아르떼 (기교, 예술)의 혼합 명사인 콤메디아 델 아르떼는 희극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간략한 줄거리를 토대로 배우들의 순간적인 즉흥연기에 의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노래와 재담, 춤, 재주 등의 만능 전문 배우들이 극을 균형있게 소화해 내야 한다. 콤메디아 델 라르떼는 연극에 가까웠으며 기교적이지만, 깊이가 없어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낮은 수준의 콤메디아는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707~1793)의 개혁을 거치며 보다 고상한 말과 문장으로 향상되어 오페라 부파 성공의 근간을 만들었다. 콤메디아 델 아르떼의 특성을 품은 부파 오페라는 보는 재미, 재치 있는 성악가의 연기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극 오페라는 줄거리의 핵심적 포인트를 성악가들이 어떻게 연기를 사실적으로 잘해 나가는가가 관건이다.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 중 한 장면(수채화). 출처 Flickr |
오페라 부파는 18세기에 ‘인테르메쪼(Intermezzo)’와 ‘콤메디아 페르 무지카(commedia per musica)’라는 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테르메쪼’는 막간극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오페라 세리아 중간에 삽입된 형태로 나폴리 작곡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단막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 1733>가 최초의 부파 오페라다. 그리고 ‘콤메디아 페르 무지카’는 음악을 위한 코미디를 의미하며 이러한 두 형태의 부파 오페라의 중심지는 나폴리였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까지 포함한 지역으로 매우 가난했으며, 우스꽝스러운 재밋거리를 즐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오페라 부파의 성장을 촉진했고 훗날 이 지역에서 발전된 ‘오페라 부파’는 러시아를 포함한 전 유럽에 퍼지게 된다.
최초의 부파오페라 단막극 ‘마님이 된 하녀’를 작곡한 페르골레지. |
유럽에서 프랑스만은 오페라 부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를 위시한 프랑스 오페라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라 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자극으로 프랑스의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의 탄생을 촉진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사건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프랑스 침투로 일어난 ‘부퐁논쟁(Guerre des Buffons)’이 당시 크나큰 이슈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17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륄리의 오페라 세리아 <아시스와 갈라테, Acis et Galatee, 1686> 막간에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가 공연되며 야기된 사건이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에 의해 올려진 이 공연을 계기로 프랑스의 음악인들과 지식인들은 둘로 나뉘어 열띤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들은 프랑스의 궁정 오페라를 옹호하는 그룹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옹호하는 그룹으로 나뉘어 벌어진 논쟁은 너무 격렬해서 전쟁이나 싸움으로 보여질 정도였다. 국왕을 비롯하여 권세가였던 퐁파르드 부인, 귀족들은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였고, 왕후와 장 자크 루소, 달랑베르, 디드로 등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지지하였다. 특히 오페라 부파를 지지했던 루소는 이듬해 발표한 ‘프랑스 음악에 관한 서한’을 통해 프랑스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음악적 치장, 선율과 대사의 부조화, 부적절한 악센트 등을 비판하고 반대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칭송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가 지닌 풍부한 멜로디, 자연스러운 감정,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작곡기법인 대위법을 버리고 선율적 아름다움을 가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전쟁은 1754년에 이탈리아 측의 패배로 끝나고 이탈리아 오페라단은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지만, 훗날 프랑스 오페라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이탈리아의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한 장면. |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는 사실주의 오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전 유럽을 호령할 정도로 대중적인 오페라 레퍼토리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오페라 부파는 기득권 세력이었던 왕족과 귀족들에겐 못마땅한 작품이었다. 오페라 부파의 주인공은 자유로운 무정부주의자이거나 귀족 등 지배 세력의 오만함을 꾸짖거나 골탕을 먹이는 일을 도맡아 했다. 오페라 부파는 신분과 물질보다 사랑이, 올바른 심성이 승리한다는 공식을 내세운다. 물질과 권력, 호색을 탐하는 지배계급에 따끔한 교훈을 주며, 이 모든 것이 혁명과 같은 급격한 변화가 아닌 교훈과 훈계를 통한 반성을 유도하며, 지혜 있는 약자의 용서와 함께 화합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한 장면.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
오페라 부파를 통해 억눌린 사회구조의 불합리와 사회 지배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사회 부조리를 해학적 언어로 세상에 끄집어냈다.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음악적인 언어에 녹아내어 극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이야기한다. 일반 대중들은 오페라 부파를 관람하며 깔깔거리며 웃고, 골탕 먹는 지배 세력에게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여긴다. 그런다고 해서 이 내용이 노골적으로 상류층을 향한 혁명적이며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조소라 할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은 대본가의 역량에 의해 교묘히 극 안에 숨을 쉬게 했다. 오페라 부파에는 이 외에도 서민들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방해꾼인 지배계급을 물리치고 쟁취해내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 이전의 오페라 세리아에 등장한 신들과 영웅, 왕족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일반 서민들의 사랑 이야기는 더 진솔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섰다. 일반 대중 자신들의 이야기가 이제 오페라에 등장한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인 오페라를 이끄는 세력이 대중이며, 더불어 시대의 주역으로 일반 시민 세력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담고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둔 대표적 오페라 부파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1786>이 초연되고 3년 후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페라 부파는 지금의 정치 코미디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는 시대가 지닌 세태에 대한 조소 섞인 비판과 함께 여러 형태의 사랑을 나열하기도 했다, 오페라 부파는 계몽사상을 담고 확장했다. 그래서 ‘구질서에 대한 질타’, 지금까지 서민들은 드러내지 못했던 ‘자아의 확대’, ‘민중적 세속주의’, 나아가 사회 약자인 ‘여성의 인권’ 등 당시의 시대정신을 잉태하는데 나름 역할을 했다. 과거 심각한 시대, 뼈있는 조소와 해학을 담아 의미 있는 웃음을 전했던 오페라 부파,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앙상블과 귀에 익은 몇 개의 아리아, 가끔 터지는 환기적 요소의 웃음을 주는 공연예술로만 청자들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오페라 부파가 담아왔던 시대정신을 알고 공연을 관람한다면, 지금과 다른 색다른 모습으로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한층 즐거움도 배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