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볼린 대학살 모습이다.
사진 출처: 레그넘·루 |
폴란드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은 격렬해졌다. 1943년 7월 11일, 150개의 폴란드 마을 및 농장이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날만 폴란드인 희생자의 수는 약 8,000명이 되었다. 이날 저지른 학살은 ‘피의 일요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볼린 학살의 가장 잔인한 날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학살은 7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1943년 7월에만 530개의 폴란드 마을이 급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민간인은 거의 탈출하지 못했다. 1944년 초에 새로운 학살이 진행되었다. 볼린 대학살은 1944년 소련 적군이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 영토에 진입하면서 끝났다.
볼린 대학살로 최소 100,000명의 폴란드 시민이 사망했다. 구체적으로는 볼린에서 40,000~60,000명, 동부 갈리치아에서 20,000~40,000명, 현재 폴란드 영토에서 최소 4,000명이 사망했다. 반면에 폴란드 국립 기억 연구소에 따르면 1945년 봄까지 약 10,000~12,000명의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의 보복 작전 중에 사망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확한 학살의 규모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관계가 대학살이라는 지점에 도달한 이유는 무엇인가?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 독일과 소련 양국은 폴란드를 절반으로 분할한다. 2년 후 나치가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 폴란드가 지도에서 사라지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 의해 주권국가로서 독립에 대한 희망 가능성이 커졌다. 1941년 6월 30일 리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국가 복원법’이 선포되었다. 독일군은 분할 정복 정책에 따라 폴란드 인구가 우세한 지역과 우크라이나인이 대다수인 폴란드 지역의 점령 행정에서 우크라이나인에게 작은 직책들을 맡겼다. 독일군의 경찰과 보조 부대는 우크라이나인에 의해 적극적으로 보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부름에 따라 군사 훈련을 받고 무기를 받을 기회를 가졌다. 이 모든 것이 폴란드인에게는 학살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폴란드인 대학살은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폴란드인 학살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과 우크라이나 저항군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들은 모든 비우크라이나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폴란드 민간인들을 소탕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폴란드인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싶어 했다.
독일 나치가 진입하자 우크라이나인들은 환영한다. 나치가 자주 독립국가인 우크라이나 건설을 도울 거라고 믿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히틀러 총통 만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만세! 스테판 반데라 만세!”로 승리의 독일군을 큰 기쁨과 감사로 환영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는 우크라이나 주를 쟁취하거나 그것을 위해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날들을 기억하자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폴란드인에게 죽음을! 반데라주의자!”를 외치며 폴란드 마을로 갔다.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을 가장 증오했다. 이처럼 나치가 왔을 때 나치의 힘으로 잔혹하게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다. 스테판 반데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추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반데라주의자들은 폴란드인과 유대인 학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반데라주의자들은 나치에 의해 더 많은 후원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 소련 후방을 해체하는 작업이 주어졌다. 1941년 4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공식적으로 제3제국과의 협력 정책을 수행하기로 했으며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의 파괴를 선언했다. 독일군이 6월 30일 리비우를 점령하자 반데라주의자들은 그곳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고, 독일군과의 합의 없이 히틀러의 보호 아래 우크라이나 국가를 선포했다. 전쟁 후 반데라는 독일에 남아 미국 및 영국 정보기관과 관계를 맺었다.
반데라주의자들은 이미 소련이 진입했을 때도 소련의 힘을 얻어 폴란드를 심판하려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인들 재산 몰수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소련이 밀려나고 나치가 들어오니 나치에 붙어서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한편, 볼린 사건을 두고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러시아 및 국제사회는 서로 다른 정의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볼린 비극’으로 정의하고, 폴란드는 ‘볼린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폴란드에서는 그것을 반폴란드인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로 간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폴란드인을 인종 청소하고 파괴했다는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는 반데라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라 범죄자로 보고 있다. 폴란드 역사가인 그제고르츠 모티카 교수에 따르면, “반폴란드 행동은 인종 청소였으며 대량 학살의 정의에 해당한다”고 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무방비 상태인 폴란드인들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임무를 설정했다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대량 학살 정책의 틀 내에서 폴란드인 제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사람은 대량 학살 요소를 사용한 인종 청소라는 공식보다는 폴란드가 독립 우크라이나 국가의 창설을 막았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면서 인종 청소 주장은 너무 가혹하고 역사적 주장을 해결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러시아에서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정부를 네오나치 스테판 반데라주의자들 이라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한다고 해서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즉, 러시아는 이 네오나치 스테판 반데라주의자들과 손잡은 미국 및 서방과 대리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네오나치) 반데라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진입 시, 나치 진입 시, 최근의 나토 동진 시에 3번째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총회에서도 나치즘 미화에 반대하는 러시아 결의안 초안을 채택했다. 모로조프는 “우리는 유엔에 나치즘의 부활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실제로 그 결의안은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지적했다. 결의안이 채택되었지만 우크라이나와 미국만이 그것에 투표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 미국과 서방은 왜 네오나치의 활동을 묵인하고 심지어는 협력하는가?
그리고 우크라이나 의회는 극우 민족주의 조직의 스테판 반데라의 탄생 110주년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텔레비전의 여러 프로그램에서 반데라는 학살자가 아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고 학교의 특별 수업 및 전시회와 박람회 등 행사에서 국가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의 명예를 위해 기념주화, 우표와 동전이 발행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반데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셴코 대통령(2005-2010)은 반데라에게 우크라이나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친러시아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2010-2014)은 이 결정을 거부했다.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2014-2019)은 우크라이나 저항군의 생존자들에게 참전용사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폴란드인 등을 잔인하게 살상한 우크라이나 무장 세력은 현대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국가적 영웅으로 선언되었다. 이러한 영웅의 판테온 생성은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선택한 과정과 관련이 있지만 반데라의 역할과 역사상 그의 위치는 뉘른베르크 재판소에 의해 이미 나치와 그 공범자로 기소 결정되었다. 이러한 미화는 우크라이나가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이며 스테판 반데라의 탄생 기념일과 우크라이나의 국경일 목록에 다른 여러 논란이 되는 사건을 포함하기로 한 결정은 역사와 인류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반데라는 ‘정치적 우크라이나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지도부가 독립 투쟁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절반이 죽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의 개인숭배 형성은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및 기타 여러 국가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정치학자 로스티슬라브 이쉔코는 반데라의 영광이 우크라이나와 이웃 국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회상했다. 정치 분석가 올렉 네멘스키도 “지금 반데라의 이념적 상속인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 반데라가 우크라이나의 분열과 붕괴의 이데올로기이었듯이 그의 이름 뒤에 숨어있는 현재 지도자들은 그것을 똑같이 이끌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는 볼린 대학살 기념일에 나토에 의해 고려되었다. 올해는 볼린 대학살이 발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폴란드는 매년 7월 11일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대학살에 대해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측의 사과 말을 듣기를 원하고 있으나 아직 듣지 못했다. 이 사건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에서 여전히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것을 ‘독일보다 더 나쁜’ 대량 학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의 최전선에 있다.
볼린 대학살은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 간의 화해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사회를 동원하기 위한 도구로 역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역사가들은 화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바실리 라세비치는 “역사는 극도로 동원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에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도 갖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역사 기억 상실증과 역사 위조는 정치인에게 전형적인 심각한 질병이다. 희생자에 사과하지 않고 잊으려는 욕구, 반면에 잔인한 살인자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변모시키는 역사 위조는 그 당시 죽은 모든 사람에게 모욕적인 일이다. 인종 청소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제 다시 러시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규모 전쟁 학살 범죄를 비판한다. 사과 없는 화해는 가장 슬픈 반성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