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기획시리즈> "전남지역 오월항쟁 재조명… 미래세대 전달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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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기획시리즈> "전남지역 오월항쟁 재조명… 미래세대 전달돼야"
●5·18 43주년 - 학교 내 기념공간 조성하자
<9> 영암 신북고
박재택 유공자 등 당시 재학생 6명
트럭 타고 총기·총탄 등 수집 역할
공업고 전환 후 행적 자료 등 유실
에너지고 “정신 계승 공간 마련 노력"
  • 입력 : 2023. 05.21(일) 17:07
  •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
1980년 당시 영암신북고 전경. 정성현 기자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최근 영암군 시종면에서 만난 박재택(63)씨는 80년 5월 당시 영암에서 활동한 ‘학생 시민군’이었다. 항쟁이 끝난 이후에는 5·18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갖은 고문 등을 겪으며 옥살이까지 견뎌야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가치가 미래세대에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 ‘시민군 도왔던 5월의 소년들’

1980년 5월 영암 신북고등학교(현 전남에너지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씨는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같은 달 21일 신북터미널에서 도움을 요청하던 광주 시위대를 보고 ‘학살의 참상’을 알게 됐다.

박씨는 그길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박찬채·최준·서성규·최황우·현흥권 등 6명과 2.5톤 트럭을 타고 시위대에 참여했다. 운전대는 마을 선배가 잡았다.

박씨 일행은 주로 무장을 위한 총기·총탄 수집 역할을 맡았다. 22일에는 지역 청년들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시종파출소 인근 뒷산에서 경찰들이 숨겨 놓은 소총 300여 정을 획득해 시위대에게 건넸다. 다음 날 오전에는 영암 도포면 상리제 앞에서 예비군 중대장이 경운기에 몰래 싣고 가던 실탄 2만3000여 발을 획득했다. 박씨는 “광주에서 왔거나 광주로 가는 시위대에게 총기 5~10정과 실탄들을 나눠줬다”고 전했다.

박씨 일행은 영암읍내로 향하던 23일 오후 ‘지역 치안유지대’에 무장해제를 당했다. 학생들은 순식간에 총을 뺏긴 뒤 경찰서에서 인적 사항을 적고 집으로 흩어졌다. 이는 훗날 이들이 내란실행 등으로 형을 살게 된 이유가 됐다.

박씨는 “부득이하게 5·18 투쟁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신북고는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유일한 사례다”며 “안타깝게도 현재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지역이나 학교에서 이를 기념·전달해 주는 매개체가 없던 탓이 크다”고 아쉬워했다.

(왼쪽부터) 고 박찬채·서성규·최준 유공자. 정성현 기자
●“5월 항쟁 학생 참여자 기려져야”

당시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신북고 학생 6명은 사망·부상·구속 등의 이유로 모두 유공자가 됐다. 이는 전남 지역 최다 수치다. 그러나 이들이 왜 다쳤고 사망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재판 기록 등으로 유공자 선정은 됐지만, 항쟁 직후 남겨진 기록이나 지역 내 사후 연구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영암 지역에서는 5·18유공자동지회에서 2022년 발간한 ‘영암사람들 5·18 항쟁기’ 구술집이 지역사 연구의 전부다. 유공자들이 다녔던 학교 또한 어떠한 추모·기념 공간도 없다.

박씨의 모교 신북고는 80년 이후 공업고등학교로 전환되면서 이름·성격이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생활기록부·사진·졸업장 등 각종 서류가 유실됐고, 현재는 아무런 행적도 찾을 수 없게 됐다. 당연히 학교 출신 중에 ‘5·18민주유공자’가 있다는 점도 잊혀졌다.

박씨는 “함께 투쟁했던 박찬채씨의 경우 (항쟁이 끝난 뒤) 자퇴했다. 이후 지인을 통해 항쟁 후유증 등으로 사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학교에) 인적 사항이 남아있지 않아 가족 연락처나 사망 원인 등을 알 수 없었다”며 “벌써 43주년이다. 지금이라도 학교·지자체에서 유공자들을 위한 연구·보존 등이 이뤄져야 한다. 더해서 학교에 추모·기념 공간까지 생긴다면 후배들도 ‘자랑스러운 선배의 모교’라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전남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 밖의 5월은 다소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5·18 전체 기소자(404명) 중 전남 출신이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 치열하게 싸웠던 전남 시민들을 위해 지역 내 연구와 적절한 보상 등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실제 박씨는 박찬채씨의 유족을 몇 년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본보가 유족회 등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어렵게 그의 여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박찬채씨 유가족 박준희씨는 “오빠가 항쟁 이후 약 5년 만인 86년 1월 우울증 등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너무 어릴 때라 많은 기억은 없지만, 항상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이 있다”며 “5·18은 아직 진행형이다. 어릴 적 떠나보낸 가족을 고향 영암과 후배들이 기려주고 기억해 준다면 몹시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정식 전남에너지고 교감은 “학생들에게 민주화 정신의 계승은 학교 교육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측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며 “도교육청·지자체와 협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오월 정신 계승을 위한 공간 마련에 적극 나서보겠다”고 밝혔다.

한편, 박재택씨와 전남에너지고는 추후 ‘당사자에게 듣는 5·18 이야기’ 등 광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여러 프로그램을 추진·논의할 계획이다.

지난 11일 영암 시종면에서 만난 박재택씨(왼쪽)와 김모씨가 광주항쟁 당시 총기 300정이 묻혀있던 시종파출소 뒤 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성현 기자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