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봄가뭄과 봄비… 상생과 상극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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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봄가뭄과 봄비… 상생과 상극의 균형”
340. 가뭄은 누구의 책임인가
<시경>의 노래들을 상고하건대, 내내 낮술에 취해 날궂이를 하거나, 벙거지 쓰고 소리 나는 것들 울리며 도깨비굿을 하는 편이 오늘날 지도자들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겠다.
  • 입력 : 2023. 03.30(목) 14:28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1969년에 신중현이 작사 작곡하고 박인수가 부른 노래다. 십수 곡에 이르는 봄비 노래들이 있지만 그중 으뜸이다. 이희우 작사 김희갑 작곡 봄비를 부른 이은하가 서운해하려나. 그래도 근자에 떠오르는 선율은 KBS 불후의 명곡에서 알리가 불렀던 봄비다. 낯설게 말하는 문학적 장치가 전혀 없다. 소주 한 잔 놓고 퍼질러 앉아 횡격막을 울리는 것은 역시 신파조다. 대중가요의 탁월한 기능이다. 신파조(新派調)는 판소리 창극 발아 때 나누었던 구파와 신파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경극과 일본의 가부키 따위가 경성(서울)의 본진을 마구 헤쳐모여 시키고 있을 때 우리 음악의 재구성이 이루어졌던 내력이 그것이다. 창극(판소리)의 형식과 전통에서 벗어나 당대의 세상 풍속이나 사람들 사이의 슬픈 이야기 등을 소재로 하여 만든 통속적인 극적 장치에서 사용하던 말투나 분위기를 말한다. 더군다나 1960년대 말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록>의 단순한 반복 진행이 사람을 취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근대기에 만들어진 장르 혹은 새로운 전통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시경>이나 운율적 노래 <초사>로부터 이어진 유구한 줄기라고나 할까. 근자에 유행했던 해체시 따위에 비교할 바 아니다. 시경의 운율을 보라. 리듬이 없고 가락이 없이 어찌 그것을 시라 이름하며 심중의 울림을 끌어내지 않고 어찌 그것을 노래라 이름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봄비 내리는 소리는 시 중의 시요 노래 중의 노래다.

가뭄과 봄비의 생극론(生剋論)

오랜만에 봄비가 내렸다. 하지만 두어 차례 봄비만으로 체증을 가라앉히기 어렵다. 올해 가뭄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광주지역 식수 저수량이 20% 선까지 무너진다는 기사를 본 게 엊그제인데 좀 풀렸으려나. 해갈에 이르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직전 칼럼을 땅갈이에 대해 썼다. 나체로 쟁기질을 하는 고대로부터의 나경(裸耕) 전통이 사실은 봄가뭄과 관련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이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요, 아파트촌에서 식수 걱정을 하는 현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물이 없어 꽃대를 세우지 못하는 식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죽어있는 것들까지 상관되는 이야기다. 논농사, 밭농사, 자식농사, 글농사, 장사농사, 심지어는 외교농사 등 농사(農事)와 경작(耕作)이라는 비유가 모든 만물의 생성과 가꿈을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농사의 시작이 봄이라면 봄의 시작은 봄비이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봄비를 읊었고, 박인수와 알리처럼 오늘날 노래꾼들도 역시 봄비를 노래한다. 봄비가 내려야 비로소 땅갈이가 시작되고 만물이 소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봄에는 비가 내려야 한다. 하지만 봄에는 가뭄이 잦다. 봄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기우제(祈雨祭)다. 반대로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것을 막아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기청제(祈晴祭)다. 기청제보다는 기우제의 빈도가 높다. 상대적으로 봄에 가뭄이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봄가뭄과 봄비는 상생과 상극의 관계에 있다. 본 지면에 생극(生剋)의 한반도(2018년 6월 15일자)라는 제목으로 논의를 풀어본 적이 있다. 조동일의 생극론(生剋論)를 인용하여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본 글이었다. ‘음양생극론’을 줄여서 한 말이니 음양오행 이론이다. 그가 생극(生剋)을 말했던 이유가 있다. 동아시아 문명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문학이론가이니 응당 인문학문과 자연학문(자연과학)의 상관관계를 소재 삼는다. 양자가 서로 상생하거나 상극한다는 취지다. 예컨대 인문학문과 자연학문은 양극이라 하고 사회학문은 그 중간이라 한다. 양자 간에 상극이 심각하면 상생을 이루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우열이 심하면 균형을 잃게 되어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다시 생극론을 소환하는 이유는 지금의 극심한 봄가뭄과 기후위기 시대를 진단해보기 위해서다. 마치 가뭄과 봄비가 상생 상극하듯이, 기후위기 시대의 생극이 무엇일 것인가 말이다. 올초 영화 <아바타2 물의 길>을 보고 감상을 적었던 칼럼(1월 13일자)을 다시 소환한다. 김상준의 <내일신문> 칼럼 한 토막이었다. “2022년 여름 더위는 많은 숲을 태우고 남북극의 빙하를 녹였다. 이제 이 겨울은 북극의 극한기류를 중간 위도 대까지 밀어내고 있다. 냉기를 막는 제트기류가 풀린 탓이다. 동서가 혹한에 몸살이다. 이런 극서와 극한의 널뛰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 협의체제를 ‘신기후체제’라 한다. ‘신기후체제’는 기후위기의 가속화 추세를 완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멈추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 지금은 신기후체제다. 가뭄이 그냥 가뭄이 아니고 혹한이 그냥 혹한이 아니다. 고대로부터의 풍속을 들어 질문한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뭄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래 팁에 그 단서를 부기해둔다. 조동일이 동아시아 문명론을 풀어 말한 생극론은 사실 동양의 오래된 철학이자 생활방식이었다. 가뭄과 봄비의 균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리의 닭살 돋는 신파풍 봄비를 들으며 울음을 삼키는 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진 봄비의 그윽함 아니 어쩌면 불균형을 염려하는 어떤 처절함일지 모른다. <시경>의 노래들을 상고하건대, 내내 낮술에 취해 날궂이를 하거나, 벙거지 쓰고 소리 나는 것들 울리며 도깨비굿을 하는 편이 오늘날 지도자들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겠다.





남도인문학 팁-기후위기의 시대, 가뭄을 책임지는 자가 진정한 지도자다



봄가뭄을 대하는 고대인들의 태도는 매우 엄중했다.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경우와 다르게 우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우제를 국가나 왕이 직접 관할했다.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남아시아 지역과는 다르게, 일모작의 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모작 환경은 가뭄이든 질병이든 단 한 번의 실수로 온 가족이 굶어 죽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실록이나 역사기록을 보면 실제 그런 사례가 수두룩하다. 태조실록에는 “비가 내리었다. 이보다 앞서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태조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억수같이 비가 내리니, 백성의 마음이 크게 기뻐하였다” 하였다. 태종실록에는 “홍수와 가뭄으로 좌정승 성석린이 사직코자 했으나 윤허치 않았다”고 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이르기를 이토록 가무니 정사하기 어렵구나” 하였다. 나는 몇 수년 전, 역병 퇴치와 더불어 가뭄퇴치 풍속 중의 하나였던 도깨비굿을 본 지면에 다루었다. 여성 전유의 반란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도깨비굿은 기후생태와 현실정치를 연관하여 해석한 민속의례 중 하나다. 명산대천을 독식한 가진 자들의 조상 묘소를 파헤쳐버린다. 기후위기가 위정자들의 독식과 편중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생극론이 이론이라면 도깨비굿은 실천이다. ‘황금가지’에서 왕살해로 인유(引喩)되는 사례들이나 근자에 대통령을 끌어내렸던 경험도 다르지 않다. 가뭄이나 역병 혹은 근자의 외교논란이 통치권자의 무능과 부조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일어서는 이유일 것이다. 기후위기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고전을 독해하는 방향이라고 할까. 왕조시대에도 왕이 하늘을 우러러 울고, 균열을 낸 대신을 갈아치우며 조바심을 냈는데, 하물며 신기후체제임에랴. 예나 지금이나 가뭄 곧 불균형을 책임지는 이가 진정한 지도자일 터, 심지어 국민간 나라간 불균형을 조장하는 자들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