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발 벗고 흙에 드러눕는다… 흙은 나에게 무엇인가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발 벗고 흙에 드러눕는다… 흙은 나에게 무엇인가
339. 땅갈이
"알몸으로 밭에 나가 쟁기질하는 풍속 裸耕. 나경은 흙과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접촉 의례다.
봄가뭄이 극심하다.
붉은 황토와 갯벌의 땅, 오늘 다시 아버지 어머니가 전해주신 남도의 전설을 듣는다. "
  • 입력 : 2023. 03.16(목) 16:47
영안굼 갈곡마을 쟁기질. 이윤선 촬영
알몸으로 밭에 나가 쟁기질하는 풍속을 나경(裸耕)이라 한다. 주로 입춘에 행하던 풍속이기에 ‘입춘나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정보를 말할 때는 으레 미암 유희춘의 문집 기록이나 농경문 청동기를 인용한다. 제주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입춘굿도 인용한다. 중국에서 전승되고 있는 목우희(木牛戱)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규태도 여러 지면을 통해 나경 풍속을 언급하였다. 진도지역에도 관련 의례가 있다. 경향신문 이기환 기자가 나경 풍속을 다루면서 진도지역을 언급하였다. 진도에서도 추석 전에 어린이들이 벌거벗고 나이 수대로 밭고랑을 가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주언 진도문화원장도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전해주었다. 다만, 구체적인 이름이나 지역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나중에 알려주겠단다. 차차 출처를 보완해나갈 수밖에 없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몇 나라에서도 유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동양 최고 고전이랄 수 있는 ??시경(詩經)??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다. 울산의 암각화에도 유사한 풍경이 새겨져 있다. 쟁기와 보습으로 상징되는 남성이 대지의 여신으로 상징되는 땅과 교합하는 성적 의례로 해석한다.



땅갈이에 붙인 그윽한 이름들



나경 풍속으로 해석되는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 몇 장면이 있다. 전면의 밭을 일구는 남성과 항아리 앞의 여성, 후면의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특별하다. 후면을 흔히 소도(蘇塗)와 솟대(神竿)로 해석한다. 이 부분은 할 얘기가 많으므로 벅수와 짐대 등을 포함해 따로 설명하겠다. 남성이 밭을 일구는 장면은 한 해가 시작되는 초봄 농경의례 가운데 파종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나경(裸耕)이나 기경속(起耕俗)의 하나다. 하지만 함경도 등지의 척박한 땅 풍속이라는 기왕의 설명은 수정되어야 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너무 의존해 해석하는 바람에, 제주의 입춘굿이나 진도의 풍속 등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암은 이렇게 말했다. “매해 입춘의 날 아침에 지방 관아에 모여서 관문의 길 위에서 나무로 만든 소(木牛)를 몰고 밭 갈고 씨뿌리는 연행을 하는데 이로써 그해의 작황을 점치고 풍년을 기원한다. 그런데 경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체로서 추위에 떨어야 한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노인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함으로써 추위를 이기는 건장함을 보이며 한 해가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룬다고 한다.” 다시 물어보니 관가에서 시켰기에 그대로 따랐다고 답하기는 했지만, 나무로 만든 소로 땅을 가는 의례의 본질적 의미를 캐묻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괴한 풍속이라고 나무랐을 따름이다. 나경(裸耕)은 적어도 농경을 시작했던 신석기시대까지는 소급될 수 있는 풍경이다. 묵인 땅이나 생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드는 일이 경(耕)이다. 땅을 새롭게 일군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생갈이(起耕)’ 혹은 ‘쌩갈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초경(初耕)은 초벌갈이, 애벌갈이, 애갈이라고 한다. 두 벌 세 벌 갈이가 뒤따른다. 중국 신화통신 2006년 8월 21일 기사를 보면, 네팔 언론을 인용한 대목이 있다.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약 190km 떨어진 카피바스투 지역에서 여성 50여 명이 벌거벗은 채 논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비의 신’을 움직이게 하려는 일종의 주술 행위였다. 이 종교적 근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아마도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의례였을 것이라 했다. 기왕의 천부지모형 해석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봄가뭄에 대처하는 고대의 풍경이라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땅과 봄비에 대한 전설이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 현현(顯現)한다. 나는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소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했다. 아버지가 연로하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우리 논은 산전답이다. 물관리를 잘못하면 농사를 그르친다. 그래서 배운 것이 일곱 벌 갈이다. 미암이 전하기를 경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체로서 추위에 떨어야 한다고 했다. 네팔에서는 여성들이 떼를 지어 발가벗고 밭갈이를 했다. 진도에서는 추석 전에 아이들이 발가벗고 밭고랑을 자기 나이순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경은 흙과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접촉 의례다. 공줏대 잔솔 우거진 내 고향 옹타리에 가면 때때로 나는 발 벗고 흙에 드러눕는다. 흙과 땅이 내게 전하는 말들을 듣는다. 흙은 나에게 무엇인가. 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봄가뭄이 극심하다. 붉은 황토와 갯벌의 땅, 오늘 다시 아버지 어머니가 전해주신 남도의 전설을 듣는다.



남도인문학팁

아홉배미 서마지기 논둑 붙이는 법-이윤선

하구달 지나기 전부터 아부지는 성화셨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어야 농사지을 수 있는 땅/ 언 땅 보풀아 오르기 전 한불을 갈아엎어 둬야/ 아지랭이 훈짐 서릴 때 되집아 엎을 수 있으니까요/ 아부지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늘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사래 긴 우리 논둑 붙일라면 쟁기 끝 몇 번 대느냐/ 저는 잽싸게 대답합니다/ 예, 아부지 일곱불 쟁기 끝을 넣어야 합니다/ 아부지 껄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라지야, 첫불은 모른 땅에다 모다서 이랑을 맹그는 것이요/ 두 불은 고 이랑을 쪼개서 되집아 엎는 것이니라/ 저는 또 잽싸게 대답합니다/ 예, 아부지 시불 쟁기 끝을 대면 첫 불과 같이 됩니다/ 아부지 껄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니 불은 고랑된 이랑을 다시 고랑으로 되집아 엎고/ 다섯 불은 이랑된 고랑을 다시 이랑으로 되집아 엎고/ 그라믄 저는 또 잽싸게 대답합니다/ 예, 아부지 고랑이 이랑되고 이랑이 고랑 됩니다/ 어무니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늘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칠월칠석 견우직녀 눈물 받자옵자믄 쟁기끝 몇번 대느냐/ 예, 어무니 쟁기 끝을 일곱불 넣어야 합니다/ 어무니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칠성별 니계절 돌아 사장등에 뿌리는 이슬 받자옵고/ 개양할미 서해 섬으로 보낸 일곱 딸 정성을 받자옵는 것이요/ 그라믄 저는 또 잽싸게 대답합니다/ 삼신할미 칠성할미 새북마다 장독대 떠놓은 정화수 받자옵듯/ 두불대고 시불대고 쟁기끝을 대야 합니다/ 어머니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니불대고 다섯불 대는 것은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되는 것이라/ 정재 부숭 조왕 감실 북새 앞서 떠놓는 맑은물 정기 받자옵는 일이다/ 저는 잽싸게 대답합니다/ 성주신 터주신 쑥물 향물 훈짐 받은 오만 정성 받자옵기에/ 일곱불 쟁기 끝을 논둑에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어머니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일곱매듭 일곱 신성 일곱 가지의 정성으로 갈았으니/ 보풀아졌다 엉겼다가 다시 보풀아지는 정성 일곱 번이라/ 여린 잎삭 다 보타지는 봄가뭄 들지라도/ 이빨 성한 써레 동서로 보모리 돌리지 않아도/ 하늘 치어다보는 산전 우리 옹타리는 새지 아니하리라/ 겨우내 갖은 쇠죽 먹고 살 오른 우리집 암소가/ 썩은 새내끼에 목매 죽는다고 엄살을 떨어대도/ 이랴, 자라, 어럴럴럴 허어/ 하구달부터 일곱불 몽글게 갈아/ 모자리, 모내기, 물 한 방울 안 새게 논둑을 붙이셨는디/ 동쪽 보모리에 옴박지만한 막걸리 주전자 놓으시곤/ 사래 길게 고랑 갈라 오실 때마다 한 잔/ 걸쭉한 막걸리 한 이랑 한 잔/ 한 고랑 한 잔, 한나페 한 잔/ 이것이 모도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되는 쟁기질법인 것인디/ 한겨울 새내끼 수십 바쿠씩 꼬실 때마다/ 자울자울 내 졸음 안으로 아부지 어머니 번갈아 들어오셔/ 일곱 쟁기 일곱 매듭 일곱 정성 노래를 하셨는디/ 꼬으신 새내끼들 손뿌닥 군살보다 더 탄탄한 덕석되고/ 방석되고 메꼬리 되고 삼태기 되고 꺼렁지 되고 깔망 되었다가/ 일곱 성신 칠성바우 하늘 치어다보는/ 산전옹타리의 이슬이 되었답니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