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 무돌길에서 만나는 ‘무동(舞童)’… 아! 정겹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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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 무돌길에서 만나는 ‘무동(舞童)’… 아! 정겹구나
담양 무동마을
화순과 담양의 접경 위치
30여 가구 40여명 주민들
밭 작물 재배해 자급자족
‘금광’이 있던 옛 부자마을
주민들 김태원 의병부대와
일본군 물리치는데 일조해
호남의병사 ‘최대 승전’ 기록
  • 입력 : 2023. 01.19(목) 17:16
  • 편집에디터
김태원 동상. 무동촌 전투를 기념해 세워졌다. 지금은 폐교된 담양남초등학교 인암분교 자리다.
무등산은 남도사람들의 정신적인 지표다. 등급이 없는 무등(無等)은 민주주의 정신에 비유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섰던 호남의병들의 흔적도 곳곳에 배어 있다.

무등산이 품은 입석대와 서석대, 규봉은 바위 예술품이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경관이 수려하고,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역사문화 유적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2013년에 국립공원, 2014년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2018년 4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무등산의 허리춤을 따라가는 둘레길이 ‘무돌길’이다. 무등산의 옛 이름 ‘무돌뫼’에서 따왔다. 민주주의의 상징답게 모두 51.8㎞, 15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화순구간 21㎞, 담양구간 11㎞, 광주동구구간 10.8㎞, 광주북구구간 9㎞에 이른다. 증심사, 원효사로 몰리는 등산객을 분산시키는 데 목적을 뒀다.

무돌길은 본디 옛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다. 크고작은 봇짐을 이고, 지고 장터를 오갔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던 생존의 길이었다. 무돌길을 걸으면 다양한 자연과 문화, 산자락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32개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의 길이고, 만남의 길이다.

무동마을은 무돌길에서 만나는 마을 가운데 하나다. 아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무동(舞童)’으로 이름 붙여졌다. ‘무동촌’으로도 불린다. 무등산의 동북쪽에서 화순군 이서면과 담양군의 접경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은 담양군 가사문학면 무동리(茂洞里)에 속한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다. 나무의 품새만으로도 아름답다. 키 20여m, 허리 높이 둘레 4m 남짓 된다. 수령 300년이 넘었다고 안내판에 씌어 있다. 나무 아래에 정자가 있다. 여름날에 마을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곳이다. 겨울엔 느티나무 옆 마을회관을 쉼터로 삼고 있다.
돌담이 이어지는 고샅과 마을 풍경. 산골의 겨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무동마을에는 30여 가구 40여 명이 살고 있다. 60대 이상이 대부분이지만, 젊은 사람도 꽤 있다. 벼농사 외에 옥수수, 고구마, 감자, 고사리, 고추, 깨 등 밭작물을 조금씩 재배한다. 시장에 내다 팔기보다 자급자족하는 편이다.

마을 가운데에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돌담으로 예쁘게 둘러싸인 샘터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식수와 생활용수로 썼던 물이다. 어머니들의 빨래터이기도 했다. 옛 빨래터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랑방이었지. 눈치 볼 사람이 없응께, 얼마나 좋아? 시집살이하면서 고단했던 마음도 나누고, 유제의 속사정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방망이질을 하다 보면 근심걱정이 다 날아갔어.”

무동마을의 솟대. 하늘을 향해 마을의 안녕과 마을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말이다. 문득, 샘터가 옛날 어머니들의 ‘해방구’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우물을 찾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삶과 추억을 떠올리기엔 맞춤이다. 그 때문일까? 우물 관리도 잘 되고 있다.

우물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지난 연말에 내린 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돌담에 올라앉은 하늘타리 열매에도 하얀 눈이 그대로다. 선홍빛의 남천 열매도 멋스럽다. 항아리가 줄지어 있는 집도 보인다.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콩으로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만들어 팔고 있다. 상호도 정겨운 ‘무동골전통장’이다.

무돌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무동마을은 무돌길 제6코스(백낭정재길)의 끝지점이자 제7코스(이서길)의 시작지점이다. 영평마을의 시무지기폭포에서 꼬막재를 지나서 만난다. 무등산의 명소인 신선대와 억새평전도 멀지 않다. 신선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동마을 모습도 절경이다. 세계지질공원의 일원으로 그 가치를 지키며 살아간다고 ‘무등산 지오빌리지’로 지정됐다.

“산골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쇼. 옛날에 부자마을이었어. 금을 캐는 광산, 금광이 있었거든. 지금은 폐광이 됐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운영됐어. 광산에서 금을 캐는, 금방아 소리가 여기서도 들렸당께.”

고샅에서 만난 어르신의 말이다. 어르신은 오른손을 뻗어 금광이 있었다는 산자락을 가리켰다. 무등산이 8700만 년 전에 화산폭발로 만들어졌고, 무동마을이 그 위에 들어선 걸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백낭정재의 지명 유래와도 엮인다. 주머니 속에 금(帛囊)을 넣고 지나던 고개다.

무동마을은 한말 의병활동으로도 명성이 높다. 1907년 12월 설날을 앞두고 김태원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무동촌에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요시다를 대장으로 한 일본군이 공격해 왔다. 요시다는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광주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다. 의병들은 마을의 돌담을 방패 삼아 일본군에 맞서 격렬히 싸워 이겼다. 무동촌 전투다.

밭이랑과 어우러지는 마을풍경. 산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바로 무동촌을 떠났다. 계속 머물고 있으면, 다시 쳐들어 올 일본군에 의해 주민들이 큰 피해를 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무동촌 전투는 호남의병사에서 최대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의병부대를 도와 일본군을 물리친 주민들의 자긍심은 여전히 높다. 산골마을 학교에 김태원 장군 동상이 세워진 이유다. 담양남초등학교 인암분교 자리다. 학생이 줄어 학교는 사라졌지만, 장군의 동상은 학교 자리에 지금도 늠름하게 서 있다.

무동마을은 소담하면서 아름다운 마을이다. 땅 한 뼘, 나무 한 그루에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고샅에 서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주고받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정겹다. 세계지질공원 무등산의 가치와 품격을 더 높여주는 풍경이고, 사람들이다. 볼수록 매력 있는 마을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 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