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옥살이는 생존권 위한 투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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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할아버지의 옥살이는 생존권 위한 투쟁이었죠"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6)농민 조합원들의 투항 '매화도'||가족 지주 불법에 집단 소작쟁의 발생||식민권력의 투입…실패로 끝난 항쟁||"선조 명예 되찾아 다행, 존경스러워||이름 다른 유공자 많아…지원 필요"
  • 입력 : 2022. 08.25(목) 18:00
  • 김혜인 기자

지난 18일 목포시 옥암동에서 만난 서병은 유공자의 손자 서호경씨가 할아버지의 표창장을 들고 서 있다.

신안군 압해읍 매화리에 위치한 매화도. 멀리서 보았을 때 '물에 뜬 매화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이곳은 '소작쟁의'라는 항거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27년 발생한 '매화도 소작쟁의'는 수많은 농민들의 피와 저항의 함성으로 진행됐다. 이들이 일제와 지주의 탄압에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이유는 그저 '먹고살고 싶다'는 이유 하나였다.

●매화도 소작쟁의의 전개

매화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소작쟁의 영향을 받았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투쟁을 통해 1924년 8월 논농사 소작료의 비율을 4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과는 신안군의 지도·도초도·자은도·하의도·매화도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매화도 소작쟁의는 다른 섬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 발생했다. 이는 매화도가 '친족 공동체'로 이뤄졌던 탓이 크다. 주변 섬들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이곳은, 18세기 초 이천 서씨가 섬에 입도한 이래 혈연과 혼인으로 이어진 마을 공동체를 이뤘다.

그러나 1920년대 초 목포에서 유지로 활동하던 서치규·서인섭 부자가 매화도의 대지주로 성장하면서 이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본인들이 가진 부유함을 무기로 매화도 주민뿐만 아니라 친족들의 땅까지 매입했다. 이 과정(토지 매매)에서 불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1927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평야를 대부분 인수한 서씨 부자는 소작인으로 전락한 마을 주민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확한 작물 중 5할을 소작료로 납부하라고 지시했는데, 문제는 '가장 수확률이 좋았던 부지에서 나온 작물량'을 기준을 삼았던 데서 발생했다.

흉년 등으로 수확률이 좋지 않았던 소작인들은 도저히 그 기준을 맞출 수 없었고, 결국 그해 수확량을 다 내고도 채우지 못한 잔량은 '빚'을 내 채워야만 했다.

이 상황이 지속되자 농민들은 1927년 6월 '매화도 농민조합'을 설립한다. 서병대가 위원장을 맡았고 서병천이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제공했다. 이들은 대지주 서인섭과 당숙-당질 사이였다.

농민조합은 지주들에게 '소작료 4할'을 통보했다. '소작료를 내고도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그러나 서씨 부자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농민들은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소작료 불납 운동'을 단행했다.

대지주 서인섭은 목포농담회(현재 목포시의회) 등의 활동으로 연을 쌓았던 식민권력을 동원해 이들의 소작쟁의를 탄압했다. 여기에 법원의 허가를 얻어 공권력을 투입, 투쟁 농민 수 십 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한참 이어진 대립은 그해 10월 추수를 앞두고 재점화됐다. 매화도 농민조합은 다시 한번 소작료 4할을 주장했고, 대지주 서인섭은 이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서인섭의 요청을 받고 매화도에 입도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쿠리야마(栗山兼吉) 검사는 직접 매화도 주민들에게 '소작료 5할'을 강요했다. 농민조합은 풍해·수해를 이유로 5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정을 말했으나, 되레 쿠리야마는 26명의 간부들을 구속했다.

1년여 가까이 진행된 싸움에 지친 농민들은 1928년 5월 '농사 경영 자금 5할을 대부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 서인섭의 소작료 5할에 합의했다. 결국 '소작료 4할'을 외쳤던 매화도 소작쟁의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매화도 소작쟁의는 조선인 지주가 대상이고, 일제에 저항하는 구호가 없다는 점에서 생존권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섬의 소작쟁의는 단순한 생존권 투쟁이 아닌, 거대한 식민권력과 싸운 항일 농민운동이었다. 식민지 체제에 편승해 성장한 지주에 대한 투쟁이자, 식민권력과 유착한 지주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었다.

고 서병은 열사 사진. 서호경씨 제공

●매화도 소작쟁의 행동대장 '서병은'

소작쟁의가 끝났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권력·지주들은 쟁의가 진행되는 동안 주도자를 '죄인' 취급했다. 구금됐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벌금 등으로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고, 더해서 이웃과 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이들에게 박힌 '범죄자' 꼬리표는 시대가 흘러도 따라다녔다.

목포시 옥암동에서 만난 서호경(55)씨는 "과거 우리 가족들에게 할아버지가 형무소에 드나들던 사실은 부끄러운 것이었던 것 같다"며 "이제라도 선조의 명예가 회복돼 정말 다행이다. 이 덕에 가족들도 더 돈독해졌다"고 전했다.

서씨는 매화도 소작쟁의에서 농민 활동가로 활동했던 고 서병은 열사의 손자로, 지난 수 십 년 동안 할아버지의 묘소를 지킨 유일한 가족이다. 서 열사는 지난해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항일 농민운동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서씨는 서 열사를 '행동대장'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쟁의 당시 섬 주민들은 '가족공동체'라는 이유로, 불의에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투쟁의 목소리를 내고 먼저 움직였던 게 바로 서 열사다.

서씨는 "당시 할아버지는 대지주의 삼촌뻘이었다. 지주들은 가족들이 섬에 거주하는데도 재산을 압류하고 과도한 세를 부과했다"며 "섬 주민들은 '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집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반발하지 못했다. 결국 답답해하던 할아버지가 압류된 집을 점거하는 등 먼저 저항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대지주들은 목포에서 쌓은 인맥 등으로 소작쟁의를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서 열사는 간부진이란 이유로 연행되기도 했다.

서씨는 "일본과 지주에 저항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포에서 온 쿠리야마 검사에 의해 연행됐다"며 "약 60%의 사람들은 단순 가담자로 훈방됐지만, 할아버지가 속한 20~30명의 간부들은 약 6개월 가량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형을 마치고 나온 할아버지는 거진 폐인에 가까웠다고 한다"고 씁쓸해했다.

이런 서 열사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원망을 샀다. 특히, 서씨의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전할 때면 항상 '불쌍한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는 "(할머니는) 항상 술만 마시면 할아버지 얘기를 했다. 욕을 한다기보다는 (할아버지가 겪은) 고초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더 큰 모습이었다"며 "이제라도 생존권을 위해 투쟁했던 할아버지의 과거가 인정받게 돼 다행이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유공자로 선정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존경스러운 마음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가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서씨는 '할아버지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공자들이 너무 많다'며 이들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범국가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씨는 "유공자들을 밝혀내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대부분 호적에 있는 이름과 실제 불리던 이름이 다르다는 점이다"며 "할아버지도 이름이 서병도·서난출·서병은 세 개였다.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아 밝혀낼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애를 먹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유공자 주변인들에 대한 조사도 적극적으로 나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오랜 억울함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이 취재는 지역 신문 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 서병은 열사가 받은 건국포장 표장장과 메달 모습.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