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담양상권 형성 중심… 복합문화공간 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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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담양상권 형성 중심… 복합문화공간 변신중
담양 뚝방마을||옛 우시장·정미소·대장간…||고샅마다 이야기 담은 그림||담양천·관방제림·국숫집||연계 관광 시너지 효과도
  • 입력 : 2022. 01.13(목) 16:20
  • 편집에디터

담양천변 뚝방마을 풍경. 관방제와 관방제림을 따라 마을이 형성됐다. 이돈삼

가분수다. 얼굴이 몸의 절반을 차지한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가 선명하다. 얼굴 가득 엷은 웃음을 짓고 있다. 그 모습이 정겹다. 돌로 다듬은 작은 석인(石人)이다. 그것도 2기가 가까이서 마주 보고 있다.

오른쪽이 할아버지다. 맞은편의 할머니보다 더 크다. 머리에 원유관(遠遺冠)을 쓰고 있다. 옛날에 지체 높은 사람이 쓰던 모자다. 얼굴에선 두꺼운 입술과 코가 도드라졌다. 눈은 움푹 패어있다. 턱 밑에 수염이 역삼각으로 길게 내려와 있다. 얼굴에서 인자함이 묻어난다.

왼편은 할머니다. 머리에 탕건을 썼다. 상대적으로 눈과 코, 입 등이 많이 닳았다. 얼굴 표정에는 인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담양읍에 있는 석인상(石人像) 얘기다. 석인상은 담양군 담양읍 천변리 뚝방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1838년(헌종4년) 담양부사 홍기섭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담양의 지세가 배 모양이고, 뱃사공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따라 세웠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석인상을 '뱃사공'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 일대는 '비석거리'로 불린다.

석인상은 마을 입구에 선 장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주민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석인상에 제사를 지냈다.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뚝방마을 골목 풍경. 고샅마다 60∼70년대 마을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서 더 정겹다. 이돈삼

뚝방마을은 오래 전 담양읍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담양상권도 여기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죽물시장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우시장도 이 마을에 있었다. 소는 물론 돼지, 닭, 오리 등을 팔았다. 시장이 쉬는 날, 서커스도 여기서 공연했다. 아직껏 '소전머리', '닭전머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우리마을 한천석 씨네 천원상회에 첨으로 텔레비전이 들왔어/ 저녁마다 대여섯 명씩 국수랑 막걸리랑 갈아주고/ 텔레비전을 볼라고 모였어. 거그가 마을 사랑방이였제'

마을주민 김남례 씨가 쓴 '천원상회 텔레비전'이다. 천원상회는 처음에 우시장의 주막이었다. 시장사람들한테 술과 함께 국밥과 국수를 팔았다.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크고작은 일을 협의하는 복덕방 역할도 했다. 천원상회로 바뀐 건 그 이후였다. 텔레비전도 그때, 마을에서 가장 먼저 들어왔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진 옛 정미소. 한때 다방으로 운영되다가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돈삼

담양에 하나뿐인 정미소도 뚝방마을에 있었다. 말과 소가 끄는 수레가 정미소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정미소를 중심으로 공장, 대장간, 상엿집, 우시장 등이 모여 있었다. 마을의 공동우물은 부녀자들의 사랑방이었다.

1919년 일제에 맞선 만세운동이 계획된 곳도 여기였다. 담양의 만세운동은 청년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조선을 학, 일본을 황새에 비유한 격문도 내걸렸다. 3월 18일 담양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면서, 만세운동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기환 등 9명이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담양의 만세운동은 이듬해 1월 창평에서 다시 일어났다.

천변에 자리한 탓에, 물난리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비가 많이 내리면 냇물이 넘쳤다. 고샅도 냇가로 변했다. 물에는 똥이 둥∼둥 떠다녔다. 인분은 물론 소똥과 개똥까지 넘실댔다. 담양의 지세가 배 형국인 탓에 물난리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떠돌았다. 집집마다 정화조가 설치되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덕분에 마을 주변 논밭이 기름졌다고 한다. 농작물 생산량이 그만큼 많았다. 농사로 부자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배에 돈이 많이 실리면 뒤집히기 일쑤라고, '담양부자는 300년 못 간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담양부자는 일찍 고향을 떠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마을 입구에 석인상이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뚝방마을은 영산강 상류, 관방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담양천'으로도 불리는 관방천은 담양읍의 중심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을이 관방제(官防堤)를 따라 들어서 있다. 1648년(인조26년) 담양부사 성이성이 수해를 막기 위해 예산을 들여 둑을 쌓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그 관방제림이다.

담양천변 뚝방마을 풍경. 관방제와 관방제림을 따라 마을이 형성됐다. 이돈삼

마을이 관방제림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천변 숲이 마을을 감싸며 재해를 막아준다. 숲도 관광자원이 됐다. 뚝방길과 천변을 따라 오가는 여행객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관방천변의 비빔국수. 옛 시장상인들을 대상으로 팔던 음식이 최근 별미로 각광받고 있다. 이돈삼

국숫집도 뚝방에 있었다. 오랜 전통의 뚝방국수 집이다. 비빔국수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돌아본 마을 풍경이 소소하다. 고샅마다 60∼70년대 마을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대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죽물시장으로 가는 아낙네들 그림이 눈길을 끈다. 마을의 자랑인 정미소와 만세운동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물레방아서 처녀총각이 몰래 만나야 이야기가 많은디/ 우리마을에는 물레방아가 없어서 연애를 못했당께/ 소가 돌리는 연자방아가 최삼열 할아버지네 집에 있어서/ 커다란 맷돌을 소가 돌리면 보리방아가 쪄졌어/ 집집마다 절구통을 두고 어깨 빠지게 쿵쿵방아 쪘제/ 지금은 참말 편한 시상이제'

마을주민 박정권 씨의 글 '방아 이야기'가 담벼락에 새겨져 있다. 마을 벽화는 재작년 '뚝방길 마실사업'의 일환으로 그려졌다. 마을의 옛 명성과 자긍심을 되살리는 데 목적을 뒀다. 담양 5일장과 국수의 거리를 연계시켜 마을을 활성화시키고 관광객의 발길도 끌어들이자는 속셈도 있었다.

정미소의 복합문화공간 조성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방아를 찧는데 필요한 장비를 그대로 두고, 다방으로 꾸몄다. 이름도 정겨운 '정미다방'이었다. 하지만 2년도 안 돼서 문을 닫았다. 지금은 공연, 토론, 모임 등을 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한번 변신을 꾀하고 있다.

대나무박물관의 조형물들. 대바구니를 지게에 짊어지거나 마차에 싣고 죽물시장으로 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돈삼

가까운 데에 있는 대나무박물관도 천변리에 속한다. 박물관은 대나무전시실과 무형문화재 전수관, 죽종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옛날 죽제품에서부터 현대 제품, 외국제품에 이르기까지 2000여 점을 보여준다. 길지 않지만 오붓한 대숲길도 어여쁘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