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여순사건 소년의 '손가락 총'…추석이 마을 제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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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여순사건 소년의 '손가락 총'…추석이 마을 제삿날
순천 신전마을||추석 이튿날 들이닥친 군인들 ||소년이 손가락 가리킨 사람들 ||총상 입은 소년 보살폈단 이유|| ‘빨치산 부역자’ 분류 총 난사 ||30여 가구 중 22명이나 희생 ||‘추석이 없는 마을’로 불려
  • 입력 : 2021. 10.21(목) 16:29
  • 편집에디터

순천 동천.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이돈삼

순천 동천.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이돈삼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우리가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가장 아픈 손가락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흘려보낼 수 없는 아픈 역사입니다."

김부겸 국무총리의 말이다. 김 총리는 지난 19일 여수에서 열린 여순사건 73주기 합동위령제 겸 추념식에서 이같이 말하고,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약속했다. 추념식은 지난 6월 여순사건특별법(여수·순천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 처음이자, 정부가 주관한 첫 번째 행사였다.

여순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의 큰 비극이었다. 처음엔 14연대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렸다. 지금은 여순사건, 여순항쟁 등으로 불린다. 공식 명칭은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린 대로 '여수·순천 10·19사건'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일부 좌익 군인들이 제주도 4·3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해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며, 미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지만, 오랜 기간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실려 있다.

여순사건은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으로 요약된다. 피해자들은 보호를 받아야 할 국가로부터 무참히 유린을 당하고도, 마음 놓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부모와 가족 잃은 슬픔을 속으로 달래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순천 팔마체육관에 있는 여순항쟁탑. 위아래로 갈라진 돌의 모양이 좌우 이념대립과 국토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이돈삼

여순사건은 여수에서 시작됐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로 가서 4·3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에 맞서 동족살상 거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14연대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했다. 봉기군들은 여수를 넘어 순천, 벌교, 구례, 남원 등지까지 진출했다.

정부군이 10월 27일 여수를 탈환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봉기군들이 지리산 등지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으로 이어갔다. 주민들은 봉기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 삶의 터전도 잃었다.

피해는 여수 못지않게 순천에서도 컸다. 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이 대표적이다. 승주에서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마을이다.

1949년 어느 날, 조용하던 산골에 봉기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리에 총상을 입은 문홍주(14살)라는 소년을 마을사람들한테 떠맡긴다. 봉기군의 위협이 두렵고, 부상당한 소년을 모른 체 할 수도 없어 주민들은 소년을 보살피며 밥도 해준다.

건강을 되찾은 소년이 마을을 떠났다. 마을사람들도 뿌듯했다. 하지만 엉뚱한 데서 일이 터졌다. 마을을 떠난 소년이 또래들과의 하찮은 다툼으로 경찰에 붙잡히고 군부대에까지 넘겨졌다.

신전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폐교. 장기적으로 치유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이돈삼

신전마을 표지석과 노거수. 마을의 아픔을 다 지켜본 나무다. 이돈삼

신전마을 표지석과 노거수. 마을의 아픔을 다 지켜본 나무다. 이돈삼

1949년 10월 8일, 추석 이튿날 밤이었다. 소년을 앞세운 정부군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다짜고짜 사람들을 모두 공터에 모이도록 하고, 소년을 위협하며 부역자들을 가리키라고 했다. 겁에 질린 소년이 마을사람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이른바 '손가락총'이다.

소년이 지목한 사람은 자신에게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를 내어준 사람이었다. 간식으로 홍시를 준 사람도 포함됐다. 군인들은 소년이 가리킨 마을사람들을 빨치산 부역자로 분류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한 집에 몰아넣고, 집밖에서 총을 난사했다.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마을에도 불을 질렀다.

30여 가구 살던 산골마을의 희생자가 22명이나 됐다. 어린아이와 거동이 불편한 환자도 들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에게 죄가 있었다면, 그때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상을 입은 소년을 밀어낼 만큼 모질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그날 이후 추석이 마을의 제삿날로 변했다. 도올 김용옥이 해방과 제주4·3, 여순민중항쟁을 다룬 책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따로 소개한 그 마을이다. '추석이 없는 마을'은 신전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여순사건 관련 순천의 사적지는 신전마을 외에도 많다. 순천역과 장대다리, 순천대학교, 순천경찰서가 꼽힌다.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열차를 타고 진출한 첫 번째 거점이었다. 나중에 정부군이 협력자를 색출하면서 열차사무소를 감금실로 썼다. 정부군은 민간인을 수박등 공동묘지로 데려가 총살했다. 동천의 장대다리(순천교)는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옛 순천경찰서는 봉기군이 경찰과 우익을, 나중엔 경찰이 좌익과 부역자를 색출해 처형한 곳이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였던 순천대학교 자리는 진압에 투입된 정부군의 주둔지였다. 많은 시민들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신전마을 풍경.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이돈삼

신전마을 풍경.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이돈삼

순천시 장천동에는 '여순10·19항쟁 역사관'이 있다. 여순사건의 전개 과정과 피해 상황, 정부의 대응과 왜곡 실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순천 팔마체육관에는 여순항쟁탑이 있다. 위아래로 갈라진 돌의 모양이 좌우 이념대립과 국토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위로 뻗은 여러 형상의 돌은 희생자의 넋과 통일의지를 나타낸다.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 잊으라' 하고, 어떤 이들은 계속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만큼 발전한다'고 했다. 정확한 피해조사와 함께 진실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뤄져서 피해자들의 70년 넘은 아픔과 고통이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순사건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도 그날의 역사와 함께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

신전마을 풍경.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