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9년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상속세제 개선 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권내현 | 너머북스 | 2만3000원
어느 노비 가계 200년의 기록을 분석해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란 인상적인 책을 집필했던 권내현 고려대 교수가 1556년 대구의 한 양반가의 가출 사건에 주목하면서 조선시대 상속의 역사를 담은 신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을 냈다. 소재가 된 사건은 이항복이 '유연전'이란 기록으로 남겼는데, 16세기 프랑스의 마르탱 게르 사건과 흡사하다. 균분 상속에서 장자 우대 상속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벌어진 소설보다 극적인 이 실화에는 '상속'을 둘러싼 당대인의 욕망과 갈등, 관습과 제도가 응축돼 있다.
책은 장남 노룻을 해야 할 '유유'의 가출과 귀향, 실종은 남은 가족들의 일상에 큰 파문을 던졌다. 8년 만에 돌아온 유유의 진위는 명확하지 않았으며, 상속과 가계 계승을 둘러싸고 그의 부인인 백씨와 동생 유연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 처가의 재산 상속에 관심이 있었던 왕족인 유유의 자형이 끼어들었다. 쉽게 해결될 것 같았던 사건은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데다 훈척 대신이 재판을 편파적으로 이끌면서 뒤틀어진다.
상속 갈등과 결과가 뒤바뀐 재판을 통해 16세기의 일상과 욕망, 관행과 제도, 사법과 정치 현실까지 폭넓게 다루는 이 책은, 이 사건에 그치지 않고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시기를 확장하여 균분 상속에서 장자 우대 상속으로의 전환 과정과 그 실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본다. 또한 조선시대 상속제도의 변화를 비교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일찍 장자 상속제를 선택한 유럽과 조선을 비교하고 그것이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탐색한다.
저자는 유럽이 장남에게 극단적으로 몰아준 장자 상속제로 인해 부가 집중됐고 경제 성장의 발판이 됐다는 견해는 유럽 중심주의라 일축한다. 즉 일부 경제사가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장자 상속제가 부의 집중을 통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게 한 발판이었다고 이해한다. 반면 이슬람 사회와 같이 공평한 분할 상속을 실시했던 지역은 재산의 파편화로 자본 축적과 근대적 경제 성장이 어려웠다고 보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견해가 유럽 중심주의나 결과론적 해석이라 비판한다.
균분이란 오랜 상속 관행을 깨고 조선 사회가 장자 우대 상속으로 재편됐던 현실적 배경을 짚어내면서, 장남에게 가계 계승의 명분을 주면서도 나머지 아들들이 상속에서 배제되지 않고 장남 주변에 머물러 살았던 전략적 선택이 한국 사회의 근대 이행의 특징이라 강조한다. 이 책은 16세기 어느 양반의 가출에서 비롯된 비극적 종말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조선의 상속 전반에 관한 흥미로운 여행을 할 수 있게 쓴 독특한 수작이다. 2021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