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완도 소안도 가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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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완도 소안도 가학마을
이돈삼 /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19. 07.31(수) 19:05
  • 편집에디터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조형물

친일 논쟁이 뜨겁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친일파 낙인찍기 경쟁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상대를 향해 '왜구' '토착왜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서로 손가락질을 한다. '기해왜란'으로도 불리는 일본정부의 수입규제 조치 이후 우리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기대고 있다. 국민과 정부, 정치권이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서로 삿대질을 하며 핏대를 세운다.

그 논쟁의 한복판이라도 서 있는 듯, 바다에 안개가 짙게 깔렸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완도 소안도로 가는 길이다. 소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화흥포항에서 뱃길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보길도와 노화도, 청산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민국호를 타고 들어가 소안항에 내렸다.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소안도는 항일의 섬이다. 화흥포와 소안도를 오가는 여객선도 대한민국만세, '대한호'와 '민국호' '만세호'로 이름 붙여져 있다.

소안도는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된 사람이 800여 명이나 됐다. 일제는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사람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며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우리 정부로부터 애국지사, 독립운동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89명, 그 가운데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에 이른다. 섬주민들이 1년 365일,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있는 이유다.

소안도의 항일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맹선리 짝지에 막사를 짓고 고기를 잡던 일본사람들을 섬주민들이 쫓아냈다. 동학농민혁명 땐 농민군이 소안도에 들어와 훈련을 했다. 섬에 접장을 뒀을 정도로 동학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이 많았다. 1894년 12월엔 동학의 지도자 이강욱, 나민홍, 이순칙 등 7명이 이 섬에서 죽임을 당했다.

1909년엔 자지도(현재 당사도) 등대를 습격, 일본인 간수를 처단했다. 일본이 우리의 수산물과 쌀·면화 등을 수탈해 갈 목적으로 세운 자지도등대를 소안도 주민 이준화 등 6명이 습격, 등대를 지키고 있던 일본인 4명을 죽이고 등대를 부숴버렸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1910. 8. 29.) 이후 소안도의 항일운동은 더욱 활발했다. 1909년부터 1921년까지 13년 동안 친일파 이기용에게 넘어간 토지소유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지난한 투쟁을 벌여 승리했다. 1913년엔 소안도에 있던 서당을 통·폐합해 신식교육기관인 중화학원을 설립했다. 비밀 항일단체와 배달청년회도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에도 일찍 참여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이었다. 소안도 주민 송내호, 정남국 등이 주도해 3월 15일 완도읍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장터 만세시위(4월 1일)보다도 보름이나 빨랐다.

사립 소안학교 설립과 강제 폐교 조치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1921년 토지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주민들은 사립 소안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설립기금 1만454원을 모았다. 현 시세로 1억 원이 넘는 돈이다.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주민들은 이 기금으로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우고 학생 수 270명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일본인이 세운 공립학교에는 일본 군무원 자녀 등 30여 명이 다녔다. 소안학교에는 완도·해남은 물론 멀리 제주에서까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

소안학교는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는다, 국상에도 조의를 표하는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한다는 등의 이유로 강제 폐교 조치를 단행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소안학교가 강제 폐교되자 섬주민들은 복교운동을 벌였다. 섬주민 1000가구 가운데 800가구가 참여했다. 일제 경찰로부터 보안감시 대상인 '불령선인'으로 불리며 온갖 감시와 고초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섬에 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간 동지들을 생각하면서 겨울에 이불을 덮지 않았어요. 아픔을 함께하면서 차가운 방에서 지낸 겁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한테는 불씨를 나눠주지 않고, 경찰과는 말도 하지 않는다는 불언동맹도 실천했어요."

이대욱(65) 소안도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의 말이다.

소안도의 항일정신을 엿볼 수 있는 항일운동기념탑과 기념관이 가학리에 있다. 섬사람들의 항일정신이 오롯이 밴 옛 소안학교가 있던 그 자리다. 기념관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20명의 흉상과 함께 독립운동가 69명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자지도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실감나게 만들어져 있다.

섬에 깊게 스며있는 항일정신 못지않게 소안도의 풍광도 빼어나다. 미라리와 맹선리의 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갯돌해변과 어우러진 미라리 상록수림은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해송 등 776그루로 이뤄져 있다. 면적이 1만6000㎡에 이른다.

맹선리에는 수령 200∼300년 된 후박나무 등 상록수 245그루가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면적이 8500㎡에 이른다. 마을의 풍광을 아름답게 해준다.

섬의 둘레길도 예쁘다. 대봉산 동쪽을 끼고 도는 북암과 비자리를 잇는 길이 멋스럽다. 오래 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길이다. 1980년대에 우회도로가 개통되면서 묵히다시피 하던 길을 최근에 단장했다. 흔한 나무 데크를 놓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직접 돌을 다듬고 흙을 다졌다. 아부산 정상과 거북바위로 가는 숲길도 좋다. 소안도 풍경과 함께 전복양식장이 바둑판처럼 깔린 주변 다도해가 발 아래로 펼쳐진다.

가학산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빤스(팬티)고개'도 애틋하다. 맹선리 주민들이 건너편 진산리 들녘에서 수확한 볏단을 이고 지고 다니느라 속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고갯길이다. 치마를 입고 가는 여인네의 속옷이 훤히 보일 정도로 경사가 가팔라서 빤스고개라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섬사람들의 애환과 추억이 서려 있는 고갯길이다.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입니다. 친일잔재 청산은 이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입니다."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했던 말이 귓전에서 맴돈다. 뼛속까지 항일정신이 배어있는 섬, 소안도에서의 여름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간다.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조형물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조형물

사립소안학교와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사립소안학교와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소안도 포구풍경

소안도 항일의섬 표지석

소안도 해상의 전복양식장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태극기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태극기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태극기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태극기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소안항일독립운동기념관 내부

독립운동가 송내호 묘지

마을에 걸린 태극기

미라리 갯돌해변과 상록수림

미라리 갯돌해변과 상록수림

미라리 갯돌해변과 상록수림

미라리 갯돌해변과 상록수림

미라리 갯돌해변과 상록수림-후박나무열매

아부산 거북바위에서 본 풍경

아부산 거북바위에서 본 풍경

아부산 거북바위에서 본 풍경

아부산 거북바위에서 본 풍경

아부산 거북바위에서 본 풍경

여객선-대한,민국,만세호

아부산 둘레길

아부산 둘레길

여객선-대한,민국,만세호

이돈삼 /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