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김과 꼬막을 양식하여 남도식탁을 풍요롭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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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김과 꼬막을 양식하여 남도식탁을 풍요롭게 하다.
  • 입력 : 2019. 06.13(목) 14:09
  • 편집에디터

완도의 대발을 이용한 지주식 김양식(1930년)

김, 광양에서 김여익이 최초로 양식에 성공하다.

갯벌이 넓기 때문에 전라도에서는 각종 조개류와 해조류가 산출되었다. 조개류로는 주로 전복, 홍합, 맛, 꼬막, 굴 등이, 그리고 해조류로는 주로 미역, 감태, 가사리, 다시마, 김 등이 산출되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이들의 자연 산출에 만족하지 않고 인공 양식에 도전했다. 그리하여 성공한 것이 한 둘이 아닌데, 김과 꼬막이 대표적이다.

먼저, 김에 대해 알아보자. 김을 영미권 사람들은 보통 'black paper'라고 한다. '검은 종이'이니, 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 동양 사람들의 식생활을 서양 사람들이 처음에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서양인에게 김이 대중적인 식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16년에 우리나라 김이 90여 개국에 3억 5천만 달러 수출되었다. 2017년에는 매일 컨테이너 46개 분량의 김이 수출될 정도였다. 수출량의 증가와 함께 조리법도 개발하여 보급 중이라고 한다. 김이 우리의 효자 수출 상품이 되어 있고, 양식 어민들의 소득 향상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김 생산의 전국 80%를 전남이 오늘날 차지하고 있고, 김 양식에 최초로 성공한 곳이 바로 전남 광양이다. 이 대목에서 타도(他道) 제조업체가 생산한 '조리김'이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김을 해의(海衣)라고 했다.'동국여지승람', '만기요람'등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에 죄다 해의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해의는 자연산이다. 바다 속 돌 위에 자연적으로 돋는 이끼[苔]로서 빛깔은 붉다. 그것을 채취해서 마치 종이처럼 조각으로 만든 것이 해의이다. 해의는 삼국이나 고려 때에는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중국 명나라를 가는 외교관이 선물로 가지고 갔다. 이 무렵 이미 중국에 조선의 해산물로 해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세종 때 150 근(斤)을 가지고 간적이 있다. 일본에 통신사가 갈 때도 해의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해의는 우리 백성이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했다. 건국 초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도 태안, 경상도 울산·동래·영덕, 그리고 전라도 일원에서 산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금 지나 15세기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충청도의 홍주·서천·태안·면천·비인·남포·결성·보령·해미 등 9읍, 경상도의 경주·울산·흥해·동래·청하·영일·장기·기장·영해·영덕·곤양 등 11읍, 전라도의 나주·제주 등 2읍, 강원도의 강릉·평해·간성·울진 등 4읍이 해의 산지로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의 주산지는 동해 바다 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해의는 "남해에서 나는데, 동해 사람들이 주먹으로 짜서 말린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 바 있다.

2백여 년 지난 17세기 초기로 가면 해의 단위로 첩(貼)이 나온다. 우리가 요즘 보는 것처럼 한 장 두 장 묶어서 포장했던 것 같다. 바로 이때 전라도 광양 사람 김여익(金汝瀷)이 나무토막에 해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양식을 시험한 결과 성공에 이른다. 이보다 뒤에 완도군 조약도 사람 김유몽이 해안에 떠다니는 나무에 해의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음 해부터 해의를 양식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광양설이 옳다. 금새 광양은 우리나라 해의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모 광양현감은 태인도에서 해의세(海衣稅)를 600냥이나 거두어서 그 가운데 183냥을 꿀꺽 삼켜먹었다가 암행어사에게 들통 난 적이 있었다. 1925년 잡지에 실린 답사기를 보면, 해의는 광양군의 특산으로 양식면적이 38만 5천평, 연산액은 35만원에 이르러 내외로 많이 수출한다고 했다.

해의를 양식자의 성을 따서 '김'이라고 하다.

광양에서 해의 양식에 성공하자, 전라도 사람들은 해의를 전라도 언어로 말하고 적었다. ①'해의'를 전라도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해우'라 발음한다. ②전라도 사람들은 해의를 최초 양식자인 김여익의 성을 따서 '김'이라 적었다. 그래서 다산도 '경세유표'에서 전라도 해조류를 말하면서 '俗名曰海衣 方言曰·', 즉 '속명은 해의이지만 방언은 김'이라 한다고 하였다. ③김 수량을 세는 단위로 토(吐)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토는 전라도 방언 '톳'을 그렇게 적은 것 같다.

김을 묶는 단위와 값은 어떠했을까? 19세기 후반 자료를 통해 바닷가 두 곳과 육지 두 곳을 알아보자.

영암에서는 50장을 1톳이라 했으나, 전주에서는 40장을 1톳이라고 했다. 당시 도량형이 유통권마다 조금씩 달랐던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인해 불편이 많아서 갑오개혁 때 도량형 통일에 나섰다. 아무튼 당시 상황은 1톳을 100장씩 묶는 지금과는 달랐다. 이때 1톳 김 값이 바닷가인 영암은 3푼이고 여수는 5푼이었지만, 육지인 전주는 1전이고 능주는 8푼이나 되었다. 육지 지역 값이 더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전주의 경우 김 4장 값이 1푼인 셈이다. 1푼은 상평통보 동전 1개이다.

양식을 함으로써 김은 전라도에서 대중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좋을 것만 같았던 전라도 사람들에게 불덩어리가 떨어지고 말았다. 많은 양의 김이 진상물로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1776년에 작성된 '공선정례'를 보면, 전라도는 12~2월까지 김을 진상품으로 각 궁에 상납해야 했다. '호남공선정례'를 보면, 모두 163첩이나 되었다. 이는 강진, 광양, 낙안, 보성, 순천, 영암, 장흥, 진도, 해남, 흥양 등 남해안 고을에 배정되었다. 문제는 납품 때 색깔이 변했다거나 맛이 떨어진다고 트집 잡는 궁궐 사람들의 횡포, 제 때에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도록 어긋나는 날씨와 절기는 전라감사로 하여금 골치를 아프게 했다. 또한 중앙에서 '대해의(大海衣)'라 하여 규격이 큰 것을 요구하여 민폐를 자아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상용 김의 제품 규격을 제정하게 되었다. 길이는 1자 1치, 넓이는 9치, 1첩은 20장, 무게는 13냥 1돈으로 각각 정했다.

김은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파고들었다. 기름과 간장을 먹이고 햇볕에 말린 김이 있어서 물과 함께 먹고 마시니 맛이 좋아 기름진 팔진미보다 나았다고 평한 이도 있었다. '김 부각'을 만들어 먹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기름과 소금을 발라 구은 김을 반찬으로 먹기도 하였다. '조리 김'임에 분명하다. '油鹽炙海衣屑 骨董飯', 즉 '김 가루' 비빔밥도 있었다. 그 결과 김이 선물로 편지 속에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추사 김정희가 하동 쌍계사의 차, 동지 전에 일찍 수확한 광양 해의를 지인에게 부탁하고서 겸연쩍 했던지 웃고 넘어간 적이 있다. 18세기에 고흥 출신 선비가 용무 차 서울 올라갈 때에 김을 잔뜩 가지고 가서 여러 지인들에게 한두 톳씩 선물로 주었다. 전라도 김을 찾는 이가 많았고 그 김을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기에는 섬진강 입구의 광양 지역에서 대나무나 밤나무를 뻘에 꽂는 '섶꽂이 식'으로 김 양식이 많이 행해졌다. 그러다가 점차 새로이 완도 지역에서 대 발을 이용하여 김을 양식하기 시작했다. 광양에서 시작한 김 양식업이 전남 남해안 전역으로 확산되며 양식법도 진화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의 이름도 해태(海苔)로 바뀌었다. 해태란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 한 건도 보이지 않는다. 전라감사가 도정을 보고한 문서에 유자, 죽순, 해의, 해태, 생복, 전복이 열거되어 있으니, 해태는 미역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해태는 어디 말인가· 일본말이다. 해의가 일본식 해태로 바뀐 것이다. 때는 일제가 '한국어업법'을 제정하여 일본인이 한국에서 '漁獲養殖과 海藻海苔'를 하게 한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따라 '해태조합(海苔組合)'이 도내 도처에 조직되었다. 세월이 흘러 20세기 중반을 넘기자, 그물을 이용한 김 양식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채취한 물김을 기계를 이용하여 김을 만드니, 건조장에서 하나씩 햇빛에 말려 만드는 '자연김'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꼬막 껍질을 화물 물표로 사용하다.

이어, 꼬막에 대해 알아보자. 꼬막은 기록에 여러 이름으로 적혀 있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로 보아 꼬막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산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꼬막을 즐겨 먹어왔다. 전라도 지역 선사시대 패총에서 꼬막 껍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1265년 무렵에 '마도 3호선'이 여수에서 임시수도 강화도로 가다가 충청도 태안 마도 해역에서 좌초되었다. 배는 2011년에 발견되었다. 길이는 12m, 폭은 8m 정도 된다. 안에서 당시 최고 권력자에게 가던 전복·홍합·상어 등의 해산물과 곡물이 화물로 나왔다. 그 가운데 내부에 한자가 적혀 있는 꼬막 껍질이 있는데, 이를 '묵서명 꼬막 껍질'이라고 한다. 이 꼬막 껍질은 수취인 또는 화물 종류가 적혀 있는 물표라고 한다. 여수 쪽 사람들이 일찍부터 꼬막을 널리 먹었고, 먹고 남은 껍질을 여러 용도로 재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려서 자주 들은 '꼬막만한 놈'이라는 말도 전라도 사람들이 꼬막을 즐겨 먹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꼬막, 벌교를 대표로 하다.

18세기 '여지도서'를 보면, 해남·강진·장흥·보성·순천·흥양에서 감합(甘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영암·해남·흥양·광양의 읍내장 거래물 가운데 감합이 보인다. 꼬막을 감합으로 적은 것 같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보면 전라도 사람들은 '고막(古莫)'이라고 불렀고, 이 이름은 이후 대표적인 이름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른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꼬막을 양식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기 조사서를 보면 순천·여수와 고흥을 끼고 있는 여자만, 고흥과 보성을 끼고 있는 득량만, 그리고 강진만 일대에서 꼬막을 양식하고 있었다. 이후 이곳에 들어온 일본인들도 꼬막을 양식하여 오늘날에는 '벌교 꼬막'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농산물·임산물과 함께 각종 수산물이 산출되기 때문에, 전라도의 음식 문화 또한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의 문무왕의 아우인 차득이 광주를 여행하던 중 안길이라는 광주 사람의 접대를 받았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 남쪽으로 공무차 내려오는 관리가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오면 우선 변하는 것이 상에 올라오는 반찬 가지 수였다. 이는 오늘날의 남도 한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역사관(광양). 김 양식이 최초로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보성 벌교 꼬막 채취모습. 보성군 제공

보성 벌교 꼬막. 보성군 제공

보성 벌교 꼬막. 보성군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