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굴비와 홍어, 남도문화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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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기획
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굴비와 홍어, 남도문화를 만들다.
  • 입력 : 2019. 05.30(목) 13:01
  • 편집에디터

'공선정례'. 전라도에서 대전(大殿) 삭선(朔膳)으로 3월에 '세린 석수어' 50속, 5월에 '구비석수어' 15속을 각각 바쳤다.

다양한 어종,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기다.

전라도에서는 역대로 갈치, 게, 고등어, 낙지, 멸치, 문어, 민어, 삼치, 상어, 새우, 숭어, 오징어, 전어, 조기, 청어, 해삼, 홍어 등이 많이 잡혔다. 이들 어종은 나오는 때도 다르지만, 서식하는 곳도 각기 다르다. 이런 점으로 인해 지역마다 물고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조기와 홍어 이야기는 뒤에서 하고, 여기에서는 청어, 숭어, 고등어 이야기만 해보겠다.

첫째, 청어. 청어는 한류 어종으로 동해 바다의 대표적인 물고기이다. 함경도 바다에서 가을철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 해변을 따라 내려와서 11월 겨울에 울산?장기 바다에서 잡힌다. 봄이 되면 차츰 전라·충청도로 옮겨가고, 여름에 이르면 황해도까지만 올라가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동국여지승람'에 함경·경상·전라·충청·황해 5도에서 청어가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해 깊은 산과 궁한 골짜기에서 물려서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청어는 당시 '국민 생선'이었다. 바로 이 청어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군인들이 청어를 매우 많이 잡자, 이순신은 이를 곡식과 바꾸라고 하여 군량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많이 잡히던 청어도 기후변화와 남획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20세기 중반에는 동아시아 바다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둘째, 숭어.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물고기는 무엇일까? 2018년 4월에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전국 하구 325곳에서 가장 많이 모습을 드러낸 물고기 80종을 정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숭어가 1위였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하구는 생물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지금은 간척지 공사로 하구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매우 넓었던 강이 영암·해남·나주·함평·무안을 아우르는 영산강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잡히는 숭어는 과거에 유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산강 하류에서 잡힌 숭어의 알을 말린 것은 가히 일품이어서 진상품이었다. 그리고 숭어는 전라도의 대표적 진상 어물 가운데 하나였는데, 한 자 넘은 것을 진상하느라 어민들 고통이 적지 않았다.

셋째, 고등어. 고등어는 고도어(古刀魚), 고도어(高刀魚), 고동어(高同魚), 청어(鯖魚) 등으로 불렸다. 동해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적혀 있다. 함경도에서 말리거나 절인 고등어를 진상물로 바쳤다. 1708년(숙종 34)에 함경감사가 감영에 들어온 진상용 건고등어를 점검하고서, 정갈하게 마르지 않은 것을 퇴짜 놓았다.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에 고등어의 특성과 어로법이 나오니 서남해에서도 잡혔다. 19세기 말기부터 일본인이 청산도에 들어와서 고등어를 잡기 시작했다. 1917년 〈전남사진지〉에 5~6월 성어기 때 한일 어선 700~800척이 모여들어 약 10만원의 어획고를 올리고 육상에는 잡화상과 요리점들이 임시 개업하여 북새통을 이뤄 번성하는 항구가 되니, 청산도는 영광 위도의 조기잡이, 여수 나로도의 갯장어 어업과 함께 전남 3대 어장으로 이름나 있다고 적혀 있다. 어선 한 척마다 30~50만 마리를 잡았고, 수송선이 고등어 무게를 못 이겨 일부러 바다에 고등어를 버리는 상황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잡은 고등어는 대다수 부산으로 수송되거나 현지 공장으로 보내져 통조림으로 제조되고, 나머지 일부만 간해서 영산포 등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청산도 간고등어'를 만들지 못한 채, 해방 후 일본인은 떠나고 고등어 잡이도 시들해졌다.

굴비, 우리 역사 최초 가공식품?

전라도 사람들은 어물 가공업에 남다른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기와 홍어이다. 하나씩 알아보자.

조기는 난류 어종으로 해류를 따라 북상하다 산란을 위해 3~4월에 펄이 쌓여 수심이 얕은 영광 칠산도에서 위도(현재 부안) 사이의 바다에 모여 든다. 산란에 대비하여 영양분을 축적한 이때의 조기는 알이 꽉 차 있고 살이 올라 있다.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는 맛있기로 유명하여 이를 잡고 팔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어선과 상선으로 칠산바다에 파시(波市)가 곡우부터 입하까지 형성되었다. 고등어(거문도, 청산도), 멸치(추자도), 강달어(비금도), 민어(임자도), 젓새우(낙원도) 철에도 파시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파시는 전라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었다.

칠산 파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5세기 초에 나타난다. 즉, "조기는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나라 쓰임에 이바지한다."고 했다. 그 모습은 19세기 〈임하필기〉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법성진의 동대(東臺) 위에서 멀리 칠산도를 바라보면 바다의 형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양 조기가 올라올 때가 되면 이를 잡으려는 배들이 바다 위에 늘어서는데, 영락없이 파리 떼가 벽에 달라붙은 것과 같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19세기 말기에 법성포에 들어온 사람은 팔도의 배 수 천척이 모여 들어 고기를 판매하는데 그 값어치가 수십만 냥에 이른다거나, 팔도에서 모여 들어 어망을 치는 배가 몇 백 척이요 상선의 왕래 또한 수 천척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기를 잡고 팔기 위해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이 법성포를 근거지로 삼았다는 말이다. 그 어선이 잡은 조기는 대부분 법성포로 반입되었고, 그 조기는 법성포 어상에 의해 소금에 절인 후 말린 굴비로 가공되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1927년에 법성포에 왔다. 갯바람에 밀려오는 코를 찌르는 듯한 비린 냄새를 맡고서, 이곳이 영광굴비가 본래 나오는 곳이라고 했다. 이어서 말했다.

봄만 되면 칠산바다에서 날마다 산더미같이 잡힌 조기가 배에 실려 법성포로 다 모여들면 기다란 토막나무를 이리저리 걸쳐 놓고 그 토막나무에 그 조기들을 척척 걸어 말린다.

이렇게 생산된 굴비는 법성포 상선과 보부상에 의해 전국에 유통되었다.

정약전의 말에 의하면, 조기 큰 놈은 한 자 남짓 되었다. 모양은 민어를 닮았고 몸은 작으며, 맛 또한 민어를 닮아 아주 담담하다 했다. 서유구는 이렇게 말했다. "장사꾼들이 운집해서 배에 싣고 와 소금을 네 번 쳐서 절여 건어를 만들거나 소금에 절여 젓을 담그는데, 이곳이 온 나라에 넘쳐흐르니 귀천을 불구하고 다 좋아한다. 대개 바다 물고기 중에서 가장 많고 맛도 매우 좋은 것이다." 조기가 전라도의 대중 생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기는 석수어(石首魚)나 석어(石魚)로, 굴비는 구비석수어(仇非石首魚)나 건석수어(乾石首魚)로 역사서에 적혀 있다. 둘 다 진상품이었다. 1776년에 작성된 '공선정례'를 보면, 전라도는 5월에 굴비라는 진상품을 궁중에 상납해야 했다. 5월에 굴비가 본격 출하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법성포 단오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굴비는 소금에 아무리 절여도 모양이 굽어지지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고려 이자겸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영광으로 유배 왔다. 그곳에서 해풍에 말린 조기 맛에 감탄하여 '굴비(屈非)'라는 글자를 써서 임금에게 선물로 보냈다. 귀양살이를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굴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한다.

홍어, 전라도를 상징하다.

선사와 고대의 유적에서 홍어 뼈와 홍어 잡이 낚시·그물·돌살이 서남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라도 사람들이 일찍부터 홍어(洪魚)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홍어는 흑산도 근해에서 많이 잡힌다. 고려 말에 왜구들이 흑산도, 즉 영산도를 공격했다. 살 수가 없게 되자 그곳 사람들은 나주 남포로 나와 터를 잡으니, 그곳이 영산포가 되었다. 그리하여 흑산도 홍어는 목포를 거쳐 영산포까지 배로 운송되었다.

강진 출신의 17세기 선비 곽성구(郭聖龜)가 광주목사 때 영암 출신의 신천익에게 홍어와 대합을 부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한 시인이 홍어에 대해 읊은 시를 보면, "부드러운 뼈는 씹기가 좋고, 넉넉한 살은 국 끓이기 좋아라"고 했다. 홍어가 제사상에도 올라왔다. 그래서 홍어 장사가 제법 활약했다. 우이도 홍어 장수 문순득이라는 사람은 홍어를 구입하러 태사도라는 섬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베이징을 거쳐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목포까지는 생으로 와서 목포 사람들은 생홍어를 즐겼다. 하지만 영산포까지 오는 도중 삭혀져서 영산포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겼다. '자산어보'에도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지방마다 기호가 다르다고 했다. 흑산도에서 영산포까지 풍선배는 15일 정도 결렸다. 이 삭힌 홍어가 다시 내륙으로 보급되어 전라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항아리에 짚을 넣어 일부러 삭혔다. 삭힌 홍어에 돼지고기, 김치, 탁주가 어우러진 음식은 전라도를 대표하게 되었다. 즐거운 날 홍어는 전라도 음식상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산포는 홍어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시대 읍지를 보면, 영산포 부근에 '홍해(洪海)'라는 마을이 보인다. 홍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집단으로 살았을 것 같다. 홍어 음식문화가 영산포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하구언으로 영산강 뱃길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영산포 홍어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영산포 홍어 축제'는 이런 유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라도 어민들은 어물을 생물 그대로 팔기도 하지만, 말리거나 삭히고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가공하여 장기 저장하거나 원거리 운송하기도 했다. 남도인의 지혜임에 분명하다.

나주 영산포 홍어의 거리. 뉴시스

코끝까지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숙성홍어의 본고장 나주 영산포에 외국인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뉴시스

옛 영광군 법성포구 굴비덕장. 영광군 제공

영광 법성포의 한 굴비 가공공장.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