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지역 관광전문가의 왕인박사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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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재발견
영암지역 관광전문가의 왕인박사 아리랑
  • 입력 : 2018. 12.20(목) 10:53
  • 편집에디터

왕인은 백제 14대 근구수왕 380년경 3월 3일 월나군(月奈郡) 이림(爾林)의 성기동(聖基洞)에서 왕 순(王旬)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지금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의 성기동이다.

성기동은 '신령스런 바위(靈巖)'인 명월(明月)의 기운(氣運)이 가득한 월출산(月出山)의 주지봉(朱芝峰) 밑에 자리한 아늑한 터(址) 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박사 왕인이 탄생한 고택지(古宅地)가 자리잡고 있다. 고택지 앞으로 차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데 이 천이 성천(聖川)이며 성천 건너편으로 월출산의 아름다운 지맥(支脈)이 느슨하게 굽이쳐 흐르고 있다.

성천 바로 위쪽에 '구유바위(槽岩)'라 불리우는 기암이 육중하게 자리잡고 고택지를 바라보고 있다.

월출산 주지봉(朱芝峰)의 맑은 정기를 받고 태어난 王仁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어린 시절 문산재(文山齋) 담 밖으로 나오는 강(講)을 듣고 홀로 글을 깨우칠 만큼 총명했다고 전한다.

인의 아버지인 왕 순은 마흔이 넘어 인(仁)을 얻으면서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들 인(仁)을 문산재(文山齋)에 入門시켜 대학자로 길러 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 때의 문산재는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와 명유(名儒)를 배출한 學文의 전당이었음으로 學德이 높은 석학들을 모시고, 가깝고 먼 각처에서 모인 우수한 수학자들이 경학(經學)을 익히는 곳이었음으로 규율이 엄격하고 뛰어난 수재만을 입문시켰다. 근세에도 문산재에서 문·무과에 급제하는 문, 무인사가 적지 않았다 한다.

문인재사는 학문의 전당

문산재 교수들은 왕 순의 간청을 받아들여 인(仁)을 입문케 했으며 왕 인의 영특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仁)의 나이 여덟살, 이제. 여기서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거유(巨儒)와 현인이 되는 것이다.

교수와 조교 그리고 서생들은 어린 소년 인(仁)의 총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의연한 몸가짐에 감탄 했다 한다.

그러나 인(仁)의 나이 아홉살 되던 해에 아버지인 왕 순은 괴질로 세상을 떠났으며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가세는 기울어져 갔다.

이런 처지에서도 인(仁)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쉬는 동안이면 조용히 문산재 부근의 숲속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자 인(仁)은 오히려 더욱 어른스러워지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었다.

왕인의 학문은 거듭 발전을 하였다. 그는 15세에 이미 논어(論語) 효경(孝經),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에 능통하였다. 이제는 스승의 가르침보다 스스로 깊이 사색하고 추구(追究)하는 시간을 더 중히 여겼다.

왕인은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속에 조그마한 석굴(石窟)을 발견하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바위덩이에 불과하지만, 굴 안에 들어가 보면 육중한 바위덩이가 지붕의 구실을 하고 있고 자연석이 사면의 벽을 이루어 마치 아늑한 방안과 같아 이것이 석굴(또는 책굴)이다.

왕인은 이 신비스런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왕인은 아침 일찍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어느 틈엔가 자리를 떠나 석굴로 들어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밤이 으슥해지면 다시 석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석굴을 王仁이 소중하게 이용한 서재라 하여 책굴(冊窟)이라 했다.

왕인은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선학들의 권고에 못이겨 과시(科試)에 응하기로 했다. 한 차례의 과시를 통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왕이 수여하는 박사제도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경박사는 역(易) ․ 시(詩,) ․ 서(書) ․ 예(禮) ․ 춘추(春秋) 등 경학(經學)에 통달한 전문적인 석학에 부여하는 칭호이다.

왕인은 8세에 문산재에 입문한지 10년만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고, 당대를 대표하는 선비가 되었으며, 백제에서도 손꼽히는 학자가 되어 왕으로부터 박사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문산재는 더욱 수학자들이 모여들어 많은 석학들을 배출함으로써 그 명성이 사해에 떨치게 되었다.

왕인박사의 도일배경(渡日背景)

박사 왕인은 그로부터 2년후 20세의 나이로 문산재 조교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學德은 왕실과 도성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신왕(阿辛王)은 박사 王仁을 여러 차례 불러 태학(太學)에서 일하여 줄 것을 종용하였는데 박사 왕인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박사 왕인은 거절했다. 그는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은고(恩顧)를 입어온 문산재에서 후학을 양성할 뜻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 결국은 박사 왕인의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신왕은 틈틈이 박사 왕인을 도성으로 초빙하여 태자 전지(賟支)와 서로 벗하며 경륜을 論하도록 했다. 전지도 경전을 능히 해독할 수 있는 학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태자 전지는 박사 왕인의 높은 학덕과 깊은 경륜에 감탄했다. 박사 왕인은 오경에 통달하였으므로 사람의 관상을 마음속으로 꿰뚫어 보았다 한다. 어느날 박사 왕인은 태자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터라 태자에게 부왕과 잠시 이별하여 물을 건너 멀리 떠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아신왕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함은 물론, 제16대의 진사왕(辰斯王)때 고구려에 빼앗겼던 10여개의 성을 다시 탈환코자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하여 아신왕 6년(397년)에 이미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와 선린관계를 유지해왔던 일본과 더욱 깊은 수호관계를 맺고 원호를 청했다.

이때 태자 전지를 볼모로 결정했다(三國史記 百濟 阿莘王條 : 六年夏 五月 王與 倭國結好 以太子 腆支爲質) 그가 바로 일본에서 말하는 아직기 즉 아지길사(阿知吉師)이다.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는 볼모의 몸으로 일본 응신(應神)천황의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그 당시 일본은 문자가 없어 구구상전(口口相傳)으로 원시상태(수렵생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화(大和)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륜·도덕도 그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비해 백제는 북방으로 중국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낙랑·대방과는 지리적으로 밀접하여 통행이 잦았으므로 국가질서의 수립이나 문화적 기반에 있어서는 고구려보다 앞서 있었다. 백제 중흥을 이룬 제13대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되는 무렵 이때 백제의 문화는 그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는 학술과 문예가 발달하여 경사(經史)·문학으로부터 음양오행·역본·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오경박사만이 아니라, 의학·역상(曆象)·복서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 칭호를 부여하여 의박사·역박사(曆博士 = 卜筮)·노반박사(鑪盤博士)·와박사(瓦博士)등의 박사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전갑홍 영암군 문화관광진흥협의회 이사장 관광학 박사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