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극장식 무대 등장… 가수들 다양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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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광주에 극장식 무대 등장… 가수들 다양한 공연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 - 17. 광주 포크 반세기 충장로 업소 출연
  • 입력 : 2017. 03.16(목) 00:00
●무대 없어 제과점 '뮤직박스' 안에서 노래를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 1973년 초에는 노래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업소 등 일반무대는 거의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그 좁은 제과점 뮤직박스 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을까.

당시 충장로를 거점으로 영업하던 제과점이 몇개 있었다. 충장로 1가에 뉴욕제과점, 우체국 건너편에 중앙제과점, YWCA 쪽에 초화당, 충장로 2가에 명성제과점, 학생회관 후문 끝쪽 코너에 태극당, 광주극장 옆 코너에 코롬방, 충장로 3가에 프린스, 4가에 부래옥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중 프린스 제과점은 필자의 절친이었던 장인성의 집안에서 운영했고, 명성제과와 함께 1973년부터 가게 안에 뮤직박스를 설치하고 전문 DJ들이 음악을 들려주는 충장로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나는 그 프린스 제과점 뮤직박스 안에서 노래를 했다. 주 고객은 중ㆍ고등학생과 대학생, 20~30대 청년들이었다.

특히 중ㆍ고생들은 교복을 입고 출입이 가능한 음악감상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주말이면 발 디딜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그만왔으면 좋겠다'는 주인의 복에 겨운 이야기가 나왔을까.

당시 인기 DJ였던 MBC의 소수옥과 박건수, 이장순, 장찬정 등 기라성 같은 광주 DJ들의 음악 퍼레이드가 매일 이어졌고,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음악이 그치던 시절이었다.


●극장식 대형무대 '투모루'와 '엠파이어'

1972년 봄 충장로 파출소 뒷편에서 운영되던 '투모루 싸롱'은 2인조 밴드로 주로 경음악을 연주하는 무대였다.

성현이 피아노와 오르간을, 정한주가 기타와 비브라폰을 연주하는 업소로 광주 최초의 정통극장식 싸롱 무대였다.

이듬해 투모루는 연주 멤버를 보강하고 서울 대형업소들의 운영방식을 따라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쇼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유명가수나 코미디언을 초청해 공연하고, 광주 출신들 트로트, 팝, 통기타 가수들을 무대에 세웠다. 낮 시간에는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도 곁들였다.

1973년 9월에는 투모루 바로 건너편인 제일극장 옆에 후일 광주의 명소가 된 '엠파이어'가 문을 열었다.

엠파이어는 주말마다 서울에서 일류가수들을 데려와 무대에서 선보였다. 광주에서도 '쇼 다운 쇼'를 보여주는 대형 업소인 투모루와 엠파이어가 대립각을 세우며 쌍두마차처럼 달렸다

투모루는 박현이 사회를, 성현과 정한주 외에 기타에 유방희, 가수에 국소남, 이장순, 최규완, 정남아, 박선영, 진선미, 최윤나, 조미라, 조분다, 박정희 등이 무대에 섰다. 주간 통기타 무대에는 국소남, 정오차, 김상현 등이 올랐다.

엠파이어는 홍영민이 사회를, 기타에 김기범, 오르간에 김광남과 김봉렬, 베이스에 이영환, 테너섹소폰에 김판호, 앨토섹소폰에 정찬민과 신순석, 드럼은 조복만과 고화석이 맡았다. 국소남과 이장순, 박정남, 박석인, 전학진, 이애자, 정소영, 손희정, 한송이, 조예정, 이영아 등이 노래를 불렀다.



●국소남 첫 개인 리사이틀

당시 사랑하는 아내가 첫째를 임신한지 4개월째였던 1973년 10월23일. 처음으로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다.

선곡, 편곡, 악기편성, 조명 등 공연에 빼놓으면 안될 중요사항들을 두달간에 걸쳐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리사이틀 날이 토요일이고, 장소가 엠파이어여서 특히 연주부분은 엠파이어 악단에 맞추기 위해 평소 무대에서 노래를 하나씩 부르며 신중을 기했다.

10월23일 오후 2시부터 공연이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평생 노래하는 동안 그때 그 무대에서 노래를 가장 잘 했던 걸로 기억된다.

공연장 1, 2층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접의자를 300개 깔아놓고, 입석으로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이 200여명 남짓 됐다.

관람료는 2000원으로 입장시 우유와 빵 1개씩을 나눠줬다. 1970년 발행된 100원짜리 동전의 현재 가격은 30만원으로 3000배가 뛰었다. 당시 자장면 한그릇이 100원, 청자 고급담배 1갑이 1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역산해보면 현재 자장면 한그릇이 5000원이니 50배로 계산하면 당시 입장료 2000원은 10만원인 셈이다.

무대에서 불렀던 레퍼토리는 주로 팝송이었다. 'Delilah', 'The end of the world', 'Yesterday', 'Song song blue'등 이다. 국내 포크 노래로는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수선화' 등을 통기타로 불렀다.



●듀엣 이장순과 국소남, 솔로의 길로

이장순과 나, 둘은 듀엣으로 시작했으니, 일반 무대도 듀엣으로 노래를 해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다름아닌 출연료가 문제였다. 당시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은 1일 출연료를 받았다. 엠파이어와 계약을 하던 날 업주 대표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1973년 봄부터 8월까지 투모루에서 노래할 때에는 둘이 5000원을 1일 출연료로 받았었다. 당시 우리의 주장은 투모루를 안 나가는 조건, 즉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엠파이어에 전속가수로 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얘기 끝에 엠파이어와 전속계약을 하기로 하고 출연료는 1만원으로 했지만, 업주는 각각 솔로 무대를 꾸며주길 요구했다.

결국 이장순과 나는 출연료 때문에 듀엣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방송 외에는 어쩔 수 없이 솔로로 각자의 길을 가야만 했다.



●통기타 가수, 한 무대에 30분이 기본

통기타 가수는 무대에 오르면 30분을 채워야 한다. 통칭 '1time' 이라 하는데, 30분을 채우려면 대략 7곡 정도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솔로로 밴드에 맞춰 노래할 때는 2곡이 기본이다. 앵콜까지 해도 10여분이면 끝난다. 음악과 관계없이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표를 갖게 되면 한군데라도 더 많은 무대에 오르길 바란다. 여기엔 장점이 또 하나가 있다. 무거운 기타를 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출연무대의 악단 구성악기에 맞춰, 악보만 준비해가면 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가께모찌', 겹치기 출연이 용이하다.

광주는 야간업소가 밀집돼 있었다. 업소와 업소간의 거리가 길게는 500m 짧게는 100m 내외다.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서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조건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겹치기 출연, 하루에 7곳 무대

1973년 가을, 하루에 7개의 업소에서 노래를 했다. 나름대로 전성기에 다가온 듯 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주간에는 주로 전문음악감상실 라이브 무대를, 야간에는 밴드에 맞춰 노래하는 극장식 무대나 나이트, 클럽을 뛰어야만 했다.

주간 통기타 무대로는 화니백화점 건너편의 '또또와' 클럽, 충장로 1가의 '주마등', 무등극장 옆 '조약돌'이었고, 야간에는 무등극장 옆 '늘봄', '유토피아', 제일극장 옆 '엠파이어', 금남로 2가 '관광호텔 나이트 클럽' 등이다.

그렇게 3년여를 보냈다. 하루에 불러야 할 노래는 35~40곡이 됐다. 한달에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단 클럽을 제외하면 한달에 이틀 휴무였다.

1970년대가 나로서는 최고의 시기였고, 전성기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노래에만 매달려 살아왔던 것이, 내 인생의 아니 내 젊은날의 전부였다.

그리 길지 않았던 세월…. 통기타가 내 인생의 반은 되는 성 싶었다. 외로움도 괴로움도 없이 내 젊음은 그렇게 지나갔다.

국소남 통기타 가수ㆍ문화공연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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