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희 아동문학가 |
30년 전,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학교에서 시를 쓰는 교수님을 만났다. 문학 수업은 교실 안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며 봄이 되면 우리를 불회사로 데리고 가셨다. 4월에 다녀와야 한다시며 서둘렀다. 불현듯 그 생각이 나서 불회사를 갔다.
그동안 불사를 많이 해서 절은 더 웅장해지고, 주변 길도 새롭게 단장해 눈에 띄었다. 주차장도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불회사는 봄을 가져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덜 푸른색, 연두색, 노란색, 노르스름한 색, 누르스름한 색, 파르스름한 색, 푸르스름한 색 등 봄에 맞는 색깔을 다 쏟아부어 놓은 것 같다.
최고의 스승은 자연이라며 자연을 보여 주셨던 스승의 그 높은 뜻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나무는 자기만의 색깔을 내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서로 동색을 만들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줄 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식이란 낳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르기가 어렵고, 또 기르기보다 가르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그 가르치는 일을 평생을 해 오는 이 땅의 선생님들. 교육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다. 어려움을 겪어보고 참기 힘든 일을 견뎌내는 동안에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게 지도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선생님들이 하고 있는데 오늘날 선생님들을 과연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들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경제가 발달되면서 우리 사회도 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가 윗자리에 서면서 종전의 전통적 가치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자녀 교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자녀 수는 적어지고 생활의 여유가 나아지면서 자녀 교육에서는 마치 잘 입히고 잘 먹이며 어려움 없이 자라도록 하는 것만이 부모의 할 일인 양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의 어린이들은 부모의 과보호와 과한 기대 속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스승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닐까.
얼마 후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유독 봄이 되면 생각나는 스승님은 스승의 날 때문일까? 이 봄날만큼이라도 스승을 찾아 나서는 하루가 되어 보면 어떨까? 스스로 반성해 본다.
며칠 전 SNS에 올려진 내 생일을 보고,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한테서 문자가 왔다. 몇 해 전에 나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은 아이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나 보다. 그때 당시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면서 스승님에 대한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이 교차했다.
나무에 가위질하는 그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훨씬 푸르다고 한다. 놋그릇도 닦지 않으면 녹이 슬고, 구슬도 흙 속에 묻히면 보배가 될 수 없듯이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굴하고 보배가 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의 선생님이시다.
현대는 재능을 갖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많고, 교육을 많이 받고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 흔하다.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기본이고,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시다고 했던가.
스승이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가 배움으로써 진보한다는 말처럼, 다양한 봄을 만나게 해 주려고 봄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가 주셨던 스승님. 지금 생각해 보면 참교육이 바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장량이 이교라는 다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신발 한 짝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렸다. 장량이 다리 아래로 가서 신발을 주워다가 노인에게 신겨 주었다. 노인은 다른 한쪽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또다시 신발을 주워왔는데 또 떨어뜨렸다. 그래도 장량이 아무 말 없이 신발을 주워 오는 것을 본 노인이 “자네는 마땅히 가르칠만하네.” 하고는 혹시 나에게 배우기를 원한다면 5일 후 이른 아침에 맞은편 나무 밑으로 오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5일째 되는 날 찾아가니 노한 얼굴로 앉아 꾸짖고는 5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하자 장량은 초저녁부터 나무 아래서 기다려 겨우 노인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제서야 노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훗날 장량이 천하대사를 도모할 수 있게 진귀한 비서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쓸만한 제자를 만나고자 하는 스승의 지혜도 놀랍지만, 배우려는 제자의 집념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세상에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되새겨 본다.
돌아오는 일요일은 스승님을 모시고 이 불회사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