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비뇨의학과장 |
학생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행도 좋아해 국내외 도시를 방문하면 그곳의 미술관·박물관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간다. 처음에는 회화나 조각품을 주로 봤지만 큰 박물관에 가면 어느 나라나 그 지방에서 출토되거나 생산된 항아리가 있어 도자기에도 흥미를 느끼게 됐다.
도자기는 수 천 년이 지나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므로 인류 문명의 훌륭한 증거품이다.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나라별로 특색 있는 갖가지 다른 형태와 무늬를 보고 있으면 옛 선조들의 일상생활, 종교, 사회상, 예술 양식 등을 알 수 있다. 당연히 큰 도시의 큰 박물관일수록 많은 도자기를 볼 수 있다. 그리스인의 도자기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진시황 병마용을 보면 시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으며,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나 복장도 알 수 있다.
전북 남원시 심수관 도예전시관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많은 한국 도공과 그의 후손들이 고난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도자기를 만든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최고의 도자기는 중국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세계 최고는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Meissen Porcelain, 동독의 주요 도시 드레스덴 인근)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던 17세기 유럽에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엄청 비싼 값으로 수입됐다. 그래서 당시 중국 도자기는 부의 상징이었고 큰 자랑거리였다. 많은 영주나 왕들이 자체적으로 중국 도자기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자기의 재료인 흙, 즉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점토였다.
마침 드레스덴 지역의 Bottger라는 연금술사가 쇠붙이(납 등)를 사용해 금을 만들 수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이를 본 왕(King Augustus)이 그를 감금하고 금을 만들어 보라 했지만 당연히 수년이 지나도 금은 도저히 만들지 못했다. 연금술사는 그 대신 1710년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중국 도자기를 만들어 낸다. 그 후 해당 기술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드레스덴 도자기는 왕의 주도하에 Bottger의 제자들이 더욱 발전시켜 현재까지 세계 최고의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필자가 분청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 필자는 1993년 미국에 1년간 연수를 다녀왔고, 수년 후 필자의 지도교수가 미국 비뇨의학회장이 돼 한국에 강의를 하러 왔다. 당시 필자는 지도교수를 데리고 용인민속촌 등을 다녔고 기념품으로 작은 도자기를 원한다고 해서 서울 인사동 선물 가게로 갔다. 지도교수는 청자와 백자 모두 제쳐두고 분청사기를 골랐다. 필자가 왜 하필이면 분청사기인지 물었더니 지도교수는 “우선 청자와 백자는 이미 흔하고 분청의 색깔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필자도 그때부터 분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필자의 부부는 두 달 전 담양 소쇄원에서 광주로 가는 길에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 표지판이 눈에 띄어 우연히 방문하게 됐다. 깊은 산속이라 큰 기대는 없었는데 자그마한 건물에 필자 부부 말고 방문객 없이 한적했다. 입구에 있는 직원이 모처럼 찾은 손님이 반가웠는지 매우 환대해 줬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넓지 않은 곳이라 벽에 걸린 설명서를 꼼꼼히 읽으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도자기 수가 적었지만 오히려 흥미로운 것을 더욱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벽면에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자기 역사와 함께 광주지역 분청사기 가마터들, 분청사기 상감기법, 인화기법, 박지기법, 귀얄기법 등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보여줬다. 또한 도자기 제작 과정을 모형으로 만들어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돼 있다.
처음 만났지만 편하고 친절한 조윤근 해설사는 필자가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했더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청산유수로 재미있고 쉽게 설명을 해줬다. 도자기뿐만 아니고 역사와 문화에도 깊은 지식이 배어 나와 도자기나 고미술 전문가인 줄 알았는데 원래 전공은 달라서 더욱 놀랐다.
제한된 공간에, 제한된 전시품을 관람하게 됐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조윤근 해설사가 예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방문객에게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곳이라면 크지만 복잡한 ‘루브르 박물관’이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많은 예술품 중 독특한 색과 모양, 다양한 그림과 문양이 있는 분청사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특히 호남에 있는 이들은 광주 북구 금곡동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 방문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