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남도 대표적 사당패 거처 공간 '월양사 절터'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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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남도 대표적 사당패 거처 공간 '월양사 절터' 주목
함평 월양사 가리내패||함평 등 남도지역 유랑패와||판소리 전개의 상관성 혹은||영향을 연구하는 중요 지점||'중턱에 산당·용굴' 등 기록||불갑산 보다 영험한 월양산
  • 입력 : 2022. 11.10(목) 16:37
  • 편집에디터
안성 청룡사 바우덕이 사당. 이윤선

함평의 가리내패와 사당패에 대하여

"이때에 하동(河東) 목골, 창평(昌平) 고살메, 함열(咸悅) 성불암(成佛庵), 담양, 옥천, 함평 월앙산(月仰山) 가리내패가 창원(昌原), 마산포(馬山浦), 밀양, 삼랑 그 근방들 가느라고 그 앞으로 지나다가 움생원의 관을 보고 걸사(乞士, 거사의 본래 용어)들이 절을 하여, '소사 문안이오, 소사 문안이오~" 신재효가 정리한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한다)에서 사당패가 전국 유랑을 하며 재능을 파는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다. 함평의 가리내패? 무슨 연희를 하던 집단이었을까? 이어지는 사설에 해답이 나온다.

"걸사들은 소고치며, 사당은 재차대로, 연계사당 먼저 나서, 발림을 곱게 하고, "산천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 가기 즐겁도다. 이야어 장송은 낙락, 기러기 펄펄, 낙락장송이 다 떨어졌다~", 한 년은 또 나서며, "오돌또기 춘향 춘향, 위월의 달은 밝으며 명랑한데~", 또 한 년이 나서며, "갈까 보다 갈까 보다, 임을 따라 갈까 보다. 잦힌 밥을 못 다 먹고, 임을 따라 갈까보다~" 등이다.

경기 선소리 산타령이나 남도잡가의 보렴 혹은 판소리 문법을 가진 노래들을 부르는 집단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당패'의 공연 레퍼토리와 유사하다. 그런데 왜 사당패라고 하지 않고 가리내패라고 했을까? 장휘주는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공연문화연구, 2006)'이라는 논문에서 "가리내패라는 명칭은 사당패가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제3자가 이들을 일컫는 과정에서 나온 용어, '거리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연희패'라는 의미에서 가리내패(街里來牌)로 이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하지만 유랑의 의미를 가진 '가리내'라는 용례가 없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어사전에서는 '부인(婦人)'을 뜻하는 경기지방 걸립패들의 은어라 했다. '가리내설구'가 '장인'을 이르는 사당패의 은어임에 비추어보면 '여자 사당'을 지칭하는 말로 풀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사당패의 명칭이 거사배, 가리내패, 사당패, 남사당패, 여사당패로 역사적 변천을 거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대에 줄타기 등 기예를 업으로 삼았던 남사당패에 비하여 그 이전의 사당패는 오로지 소리만을 연행하여 생계를 유지한 유랑패라는 점에서 그렇다.

안성 청룡사 바우덕이 동상. 이윤선

함평의 월양산 월양사를 주목하는 이유

신재효본 박타령(오늘날의 흥보전)에는, 서시(西施)가 나오는 모습이 묘사된다. 서시(西施)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이다.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 왕구천이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어 부차가 그 용모에 빠져 있는 사이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고사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상야릇하게 꾸민 서시가 놀보에게 절을 하며 아뢰기를, "소사(小寺) 문안이요, 소사 문안이요...전라도로 의론하면 함열(咸悅)에 성불암(成佛庵), 창평(昌平)에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에 월양사(月良寺) 여기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에 살 수 없어....."라고 사설을 늘어놓는다. 여기서의 '월양사'는 어디일까? 박타령과 가루지기타령에 모두 나타나는 곳이 함열의 성불암과 함평의 월앙산 혹은 월양사이다.

가리내패가 웅거했던 남도의 대표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차후 지면을 달리해 살필 예정이지만, 서울로 동원되었던 재인 광대들 중 호남 혹은 남도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사당패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컨대 <나례청등록> 재인 광대들이 경기도 30명, 충청 52명, 경상 32명, 전라 170명 등 300여 명에 이른다는 내용은 물론이고 이들이 연행했던 장르가 악기연주에서부터 가창, 춤, 곡예, 연극을 망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사당패가 소리를 중심으로 유랑하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다시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호남의 대표적인 가리내패 거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함평 월앙산이라는 명칭은 없다. 유사한 이름으로 월악산과 월양산이 있을 뿐이다. 월악산과 월양산 중 가리내패와 관련 있는 산은 어디일까? 함평의 옛 이름인 함풍현과 모평현의 옛터를 훑어 월악산과 월양산의 사찰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에는 함평현 월량사(月良寺)가 모악산 서쪽에 있다고 했다. '동국여지지' 전라도 사찰조에도 월양사(月良寺)가 등장한다. '함평군문화유적'에는 고려절터가 해보면 해보리 금계리 월현마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평군사'에는 월양산(月陽山, 해보면 해보) 월양사(月陽寺)를 소개하고 있고 한자가 다른 월양사(月良寺)를 소개하고 있다. "해보면 해보리와 상곡리, 산내리를 경계하는 월양산에 있던 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전부터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주춧돌과 깨어진 기왓장이 절터임을 말해 줄 뿐이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1934년 간행한 '함평지'에는, "중턱에 산당(山堂)이 있고 또 용굴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보 사람들의 입을 빌려 말하기를, 불갑산보다 월양산이 더 영험스런 산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동면 서호리에서 전통차를 생산하고 있는 부루다원 관련 기사(박경일, 문화일보, 2012. 5. 19)에는, 폐사된 절집 월양사에서 10ha의 야생차밭을 발견했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조선시대 함평의 차밭 기록을 뒤지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차농사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함평 월양산(해보면)에 월양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이곳은 신재효가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면서 흥보전과 변강쇠가의 두 곳에서 언급할 만큼 남도지역의 대표적인 가리내패(사당패) 거처 공간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월양사 절터를 특정하여 관련 맥락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과제로 남겨둔다. 이것이 함평뿐만 아니라 남도지역 유랑패와 판소리 전개의 상관성 혹은 영향들을 연구하는 중요한 지점일 수 있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묘. 이윤선

남도인문학팁

함평 월양사와 문화사적 의미

사당패 관련해서는 전국적으로 안성의 청룡사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전라도에서는 함열(함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음)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함평의 월양사가 대표적으로 거론됨을 볼 수 있다. 안성의 청룡사는 바우덕이 축제를 중심으로 사당패 성역화 작업을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함열의 성불암은 터만 남아 있다. 당시 암자에 있던 칠성각은 천년 고찰 숭림사로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당패 관련 언급이나 선양 사업이 거론된 것 같지는 않다. 창평의 대주암도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시대에 따라 사찰의 이름들이 변하고, 폐사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 것이다. 함열이나 창평은 한때 번성한 군현의 도시였지만 지금은 면 단위의 작은 고을이 되었다. 사당패가 웅거하던 시절은 아마도 이 도시들이 번성했던 시기와 맞물릴 수 있을 것이다. 사당들의 공연 탁발을 후원하거나 운영할 만큼 사찰이나 암자의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오는 11월 26일 함평에서 개최되는 '정창업' 관련 학술회의에서 내가 발표할 주제이기도 해서 여러 자료를 추적하던 차, 노기욱 전남 문화연구소장께서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바라기는, 함평군이든 전남도든 함평의 월양사 옛터 찾기를 통해 남도의 잃어버린 문화사를 보완하고, 판소리 재구성에 일조했으면 하는 것이다. 최소한 옛터에 안내표지판이라도 세워두면, 후세인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겠는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