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친구, 홍범도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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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고려인친구, 홍범도장군
  • 입력 : 2022. 08.16(화) 15:48
  • 이용규 기자
이용규 논설실장
홍범도 장군은 항일투쟁의 전설이다. 1868년 함경북도 출신인 홍범도 장군은 삼수·갑산을 본거지로 포수 조직을 이끌고 국내에서 반일 의병운동을 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와 봉오동 전투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중심에 섰다. 이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됐지만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역할을 했다. 고려인 시인 등 문학인들은 홍범도 장군을 시와 소설 등으로 역사의 전면에 내세워 그를 숭상했다. 그의 서거 4년전, 71세였던 홍 장군은 크줄오르다 고려극장 수위장으로 근무하며 동포 사회 어른으로서 크고 작은 역할을 다했다. 이때 홍 장군의 월급은 50루블. 고려인들이 강에서 물을 끌어다 벼농사를 시작할 때는 "농사가 잘돼야지"격려하고 노심초사했다. 낯선 이국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홍 장군은 본인의 요청으로 1939년 10월1일 극단 경비원에서 해임됐다. 이 내용은 지난해 카자흐스탄 정부가 기증한 고려인극장 해임 지령서에 담겨있다. 지난해 광복절에는 그의 유해가 78년만에 고국에 송환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일본군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으로 불렀던 그가, 올해는 그의 생일(8월27일)을 앞두고 광주 고려인마을에 무서운 영웅이 아닌 친근한 이웃으로 다가왔다.

고려인은 구한말 기근과 일제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과 그의 후손을 말한다. 연해주에서 뿌리를 내려가던 이들은 1937년 9월9일 밤부터 그해 12월까지 17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굶주림과 추위, 사고로 죽은 사람이 2만 여명에 달한다. 그 죽음의 강제이주 행렬에는 홍 장군도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흩어진 고려인들은 마을 하나없는 벌판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벼농사를 성공시켜 중앙아시아의 곡창지대로 변모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1956년 스탈린 사망이후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어 연해주로 되돌아간 이도 많지만, 상당수 고려인은 현지에 남았다. 러시아어 밖에 모르는 이들에게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자국 언어 정책으로 다시 가시밭길의 세월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산재한 고려인은 약 50만명이다. 국제사회의 나그네인 고려인들이 고국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그 중심에 광주 고려인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러시아 침공으로 사지를 탈출한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의 대거 고려인마을 정착은 나그네를 품는 광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고려인 마을에는 이들 말고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독립군 후손 고려인 8000여명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고려인 마을에 세워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그의 묘지가 있던 크줄오르다 주정부는 홍장군을 영웅으로 대접하고 묘역 성역화를 비롯한 홍범도공원, 거리 조성으로 그를 기렸다. 홍 장군이 고려인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으로 그의 유해 송환 문제가 그동안 쉽게 성사되지 못한 이유다. 특히 크줄오르다 고려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려인마을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홍 장군의 서거 40주년인 1983년 조각가 최니골아리와 미술가 허블라 지마르가 제작한 반신 청동상을 모델로 했다. 사해주의자 홍범도 장군의 정신이 세계속의 고려인을 묶어내 광주·전남, 대한민국이 드넓은 유라시아로 향하는 안내자이자 동반자로서 역할을 기대한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세워진 지난 15일, 우리 정부가 독립지사 후손 고려인들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해 남다르게 다가왔다. 몇차례 중앙아시아 취재 과정에서 만난 무국적 고려인들의 절절한 아픔을 들었던 터라, 이들에게도 고국의 따뜻한 배려가 올 날을 고대한다. 이용규 논설실장

이용규 기자 yonggyu.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