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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28> 봄을 기다리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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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28> 봄을 기다리는 예술

이선 광주 남구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게재 2022-03-06 14:15:55

거듭되는 고난 속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3월의 따뜻한 봄이 시작되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신학기를 맞이하여 책가방과 설레임을 안고 개학이라는 교문을 넘어섰다. 하지만 매일 하교 후, 학교에서 나눠 준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로 자가진단을 하며 설레임과 동시에 얻은 불안감 또한 떨칠 수 없는 심정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28번째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는 봄을 그토록 기다렸던 예술가이자, 세계적이고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박수근을 소개한다. 얼마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성황리에 종료되었던 대규모 회고전시<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2021.11.11.~2022.03.01.) 을 돌아보며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박수근_나무와 두 여인_캔버스에 유채_130×89cm_1962년_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_나무와 두 여인_캔버스에 유채_130×89cm_1962년_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진행되었던 박수근 회고전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전시는 총 4부로 가족, 소설가, 컬렉터와 비평가의 다양한 관점으로 전시실이 나누어져 구성되었다.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박수근의 작품과 관련 아카이브 자료, 그리고 한영수(사진가, 1933~1999)작가의 시대를 반영한 사진 및 중년이란 나이에 상업여성지로 등단해 섬세하고 현실적인 서민의 삶을 썼던 박완서(소설가, 1931~2011)작가의 1976년 소설 <나목>이 근간이 되어 전체적으로 흐름이 연결되었다. 한영수는 박수근이 살아생전 거닐었던 거리를 비롯해 전쟁 직후, 시대 및 서울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던 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박수근 작가가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 마지막 타계 직전에 제작한 유화 작품, 그리고 타계 전 미공개되었던 1964년 작품들까지 총 163점으로 구성되어 전 생애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들을 촘촘하게 소개해주었다.

그동안 한국근대미술사를 바탕으로 기록 되었던 예술가, 박수근 뿐만 아니라, 가족과 예술가들이 바라본 인간, 박수근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해석을 재조명 할 수 있도록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박수근이 자신의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카데믹에 기반 한 미술(예술)의 미적 기준이나 기술(테크닉)의 여부와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삶이 투영 된 진실함이 작품에 담겨야한다고 생각했던 화가였다.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작품에 기록하고 담고자 눈에 보이는 현실 풍경에서 시작해 집약적 회화로 묘사해 나갔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박수근 작가노트.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 정림리 산골마을에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서른 한살 때 해방을 맞이하였고 곧바로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남한으로 내려와 피난민의 신분으로 경제적 기반도 전무했으며 피폐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까지 이어져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며 가정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림 또한 독학으로 공부하며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화가(농부 화가로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를 동경하며 틈틈히 성실하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경력을 쌓아오다 39세,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이 전람회는 1949년 문교부가 창설했다. 6.25전쟁으로 중단되어 다시 개최되었다) 두 작품을 출품하여 <집> 특선, <노상에서> 입선을 한 후 남한의 미술계에서도 화가로 인정 받아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창신동 집에서 박수근, 가족과 함께_1959년_국립현대미술관
창신동 집에서 박수근, 가족과 함께_1959년_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전쟁 직후 암울한 상황 속에서 굳건하게 살아가기 위해 박수근과 가족이 함께 머물렀던 곳이자 작업의 많은 모티브가 되었던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살았다. 당시 창신동은 동대문 시장과 가까운 동네로 일찍부터 서민들이 모여 살았고, 피난민들이 정착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이나 노상, 장터 사람들, 아기를 등에 업은 소녀, 줄지은 골목길과 판잣집 등 주변 이웃들의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모습과 풍경들이 작가의 애정어린 눈길에 담겨 화폭에 많이 등장하였다.

박수근은 주변의 마주했던 사람들을 애처롭게도, 선하게도, 당당하게도 하나의 관점에서 그리지 않았다. 그가 현재 '선한 화가' 또는 '국민 화가' 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하나의 관점을 떠나 담담한 필체와 독자적인 화풍으로 담아낸 실상이 불러일으키는 삶에 대한 일상적 긍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쟁 후 시대 속 시련 앞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굳건히 살아가는 일상을 받아들이는 달관자적 태도가 박수근의 그림에는 진솔하게 담겨있다. 화가의 이러한 마음은 곧 그의 예술적 의지이자 목적이 되어 서민의 모습을 단순히 인상적으로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평면화 작업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화가 이전 개인의 감정에서 독립 된 완전한 인간으로의 삶을 존재적이고 주체적으로 바라본 그의 사실주의적 표현은 화강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摩崖佛)처럼 기념비적 형식과 성스럽고 거룩한 분위기가 담겨있다. 화면 속의 두터운 마티에르(matiere)가 느껴지는 독자적 기법은 회백색의 물감을 덧칠하여 물감층의 구사기법과 질감(質感)이 스민 애잔한 한국 정서와 작품 속 내러티브가 깊이감 있게 드러나 타자의 감정이 투영되면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세 여인_나무판에 유채_21×46.4cm_1960년대_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세 여인_나무판에 유채_21×46.4cm_1960년대_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생전의 박수근은 미술계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 화가였고, 온갖 역경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불굴의 예술가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가 남긴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정경들은 그만의 토속적인 미감과 서정성이 담긴 작품들로 남아 시간이 흐를수록 값진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2002년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념하기 위해 고향 강원도 양구군에 설립 된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 창작스튜디오(레지던스) 및 학술세미나, 주요 전시회와 최근 해외 교류전시(프랑스 밀레재단)까지 그 영역을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여 활발히 운영되고 있어 많은 지역의 작고 예술가에 대한 기념과 재해석의 선사례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번 덕수궁 전시의 관람 포인트로, 박수근의 작품과 작품 사이 그리고 전시실 곳곳에 박완서 작가의 <나목> 글귀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열 가지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까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부분은 마치 박수근의 작품 그대로를 글로 옮겨 놓은 듯한 심상을 전달해주고 있는 듯하다.

박수근_고목(古木)_종이에 수채, 연필_23×52cm_1961년_개인 소장
박수근_고목(古木)_종이에 수채, 연필_23×52cm_1961년_개인 소장
박수근_아이를 업은 소녀와 아이들_캔버스에 유채_45.5×38cm_1960년대_서울옥션
박수근_아이를 업은 소녀와 아이들_캔버스에 유채_45.5×38cm_1960년대_서울옥션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전시를 통해 다시 한번 '화가 박수근을 어떻게 기억해야 해야 하는가, 예술은 무엇을 남기는가,' 에 대한 생각은 일상 속 평범함의 가치가 고귀해진 시대,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주위를 맴 도는 3월의 봄을 기다리던 마음과 위로가 아닐까 되짚어본다. 전시장 마지막 부분에 써 있던 봄을 기다리던 박수근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작가노트를 공유한다.

" 나는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도 채 오기 전에 봄 꿈을 꾸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에는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 〈박수근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