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61>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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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61>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그 무엇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 입력 : 2025. 02.09(일) 17:59
‘존 발데사리, 노년의 자화상’. 이선 제공
존 발데사리 작 ‘I Will Not Make Any More Boring Art’. 이선 제공
“예술은 답습을 허용하지 않는다.”

매년, 아니 매일 새로운 예술 이론, 운동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의 생태계는 빠르게 돌아간다. 과거 자연을 그대로 그리는 회화에 대한 반발로 인상파(impressionism)와 야수파(fauvism), 입체파(Cubism)가 차례로 탄생했고, 20세기에 들어서 이미지 자체를 저항하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등장한다.

올해 두 번째 칼럼에서는 개념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현대미술 작가를 소개한다. 할리우드 문화를 가까이에서 접한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존 발데사리(1931~2020년, 캘리포니아) 작가다. 그는 회화 작업을 시작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한 이면화(diptych)를 시도했다.

그는 매스미디어와 현대의 신화에 관계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내려는데 일조했던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1957)에서 추출한 텍스트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등 언어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으로 구현한다.

초기에는 텍스트만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나, 이후 문자와 사진을 결합해 다양한 재료와 주제를 언어와 시각성의 상관관계로 보여줬다. 사진으로만 구성된 ‘복합 사진’ 형태를 취해 자유로운 연상만으로 새로운 변위적 예술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방식을 시도하며, 미술이 결과물보다 예술가의 아이디어나 작업 과정으로서 소명을 다한다는 걸 증명한 것이다.

발데사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68년에 1953년부터 1966년까지 13년간 작업한 회화작품을 모두 소각시켜 없애버리는 ‘화장 프로젝트(The cremation preject)’가 있다. ‘화장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개념미술이 의도하는 바를 실행에 옮겼는데, 이것은 전통예술의 권위와 엘리트주의 규격화된 형식의 틀을 거부한다는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후 13년간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불태우고, 그 검은 재로 쿠키를 만들어 유리병에 담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하며 관람객들에게 ‘나의 최고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 사건은 더 이상 그를 교육자 또는 개념미술가로 규정할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됐다. 그의 ‘화장 프로젝트’ 작업은 그동안 고루한 전통미술의 죽음과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행한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발데사리는 인터뷰를 통해 “창의적이려면 때로는 아주 파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불사조가 재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낡은 그림에 집착하는 것은 예술적 창의성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지루한 예술을 만들지 않겠다” 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1977년 자신의 텍스트 작업 ‘I Will Not Make Any More Boring Art’로 구현돼 많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선사했다.

태워진 그림의 재를 확인하는 존 발데사리 작가. 이선 제공
존 발데사리 작가가 태워진 그림의 재로 만든 쿠키. 이선 제공
이러한 발데사리의 작가적 태도에 대해 일각에서는 미국 개념미술 운동의 맥락에서 매체 다양성을 이끌었다는 지점을 주목했으며, 작가는 미디어 이미지 차용을 작품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작가의 텍스트와 차용은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등 20세기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으며, 그의 방법론은 이른바 픽쳐스 세대(The Pictures Generation: 1974년부터 1984년 사이의 미술을 가리키는 용어) 로 잘 알려진 바바라 크루거, 데이비드 살리 등의 동시대 예술가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작가는 1970년대 명문예술학교 칼아츠, 캘리포니아 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예술 교육자로 30년간 교단에 섰다. 그리고 작가로 사진과 그림, 문자, 인식 가능한 물체나 인체 기관의 모습 등을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해 새로운 멀티미디어 작품으로 빚어냈다. 비평가들은 그를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개념(컨셉트) 미술가임이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에서 ‘포스트-스튜디오 아트(Post-Studio Art)’ 교수법을 적용하며, 스튜디오(작업실) 밖으로 나가 회화가 아닌 대중 매체와 인쇄물 이미지로 다양한 작업을 해보길 권했다. 당시 미술로 인정받지 못한 분야나 존재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그 방식은 사진과 개념주의 미술이 가진 도발과 유머가 젊은 세대의 미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발데사리 작업은 당시의 할리우드 저예산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등 특징적인 방법론을 시작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미술사 대가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추출하는 등 ‘차용(借用)’은 발데사리의 작업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이 되었다. 작가는 스스로 자기의 작품은 미술 수업에서 다루는 방식들에 대한 선례이면서 예술 그 자체라고 종종 언급했다.

이처럼 발데사리의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와 오늘날의 미술에 시사하는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미술에 대한 그의 관점과 함께 사진-개념미술에 함의된 바를 ‘텍스트와 미디어 이미지 차용’이라는 다양한 변위적인 현대미술 이론을 전파하였고, 전통에 반기를 들어 자신만의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었다.

존 발데사리 작 ‘The Fallen Easel’. 이선 제공
1970년대 칼아츠 학생이었으며 나중에 친구가 된 데이비드 살레는 생전의 고인이 “발데사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즐기기 전에 뭔가를 학문적인 지식이나 자신이 아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낱말들과 이미지들을 섞었지만, 여러분이 굳이 퍼즐의 밑바닥을 알아내려고 열심히 굴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그는 학생들을 결코 시험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교육을 통해 예술의 즐거움과 실천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발데사리의 열정이었으며, 그의 작품 역시 그것을 담고 있었다. 이후 1980년 중반부터 원색의 기하학적 형상을 사용하였는데, 사진의 일부를 가리거나 특정 형상을 단색의 평면으로 지움으로써 비현실성을 강조하였다. 또 인물의 얼굴 위, 얼굴 안에 눈, 코, 입에 노랑, 빨강, 파랑의 원색 동그라미를 그려 익명성을 상징적으로 부여하고, 인공과 자연, 구중과 개인, 남성과 여성, 혼란과 질서, 과거와 현재, 사랑과 미움의 감정 등을 대비시켜 작품 안에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의 작품은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등 매체와 양식의 다양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서전적이면서도 역사와 사회, 문명을 아우르는 중층적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할리우드 저예산 영화의 스틸 사진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에 세 가지 색을 넣어서 사람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가장 넓은 면을 강렬한 오렌지색 물감으로 덮었고 제목 그대로 얼굴은 파란 원, 램프는 초록으로 칠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은 일상의 관습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진이 진실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는 형태를 조작하거나 물감을 덧칠함으로써 더욱 어려운 진실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존 발데사리 작 ‘Frames and Ribbon’. 이선 제공
존 발데사리 작 ‘Person on Bed(Blue) With Large Shadow(Orange) Lamp(Green)’. 이선 제공
존 발데사리의 작업은 언제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며 실천했다. 사진과 미술의 역사를 구분 짓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방식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해 나갔다. 그의 작품은 과거 수많은 전통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과 개념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예술적 대화들을 시도한 것이었고, 관람객들은 그 대화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