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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안중근 의사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건립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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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안중근 의사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건립된 사연

1910년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격살
1961년 광주공원에 전국 최초 ‘숭모비’ 건립
1987년 중외공원에 이설, 1995년 돌연 사라져
본보 2019년 2월 25일자 1면에 실종기사 게재
이근준 씨 나주 석재상에 방치된 숭모비 발견
자비로 숭모비 매입, 광주시에 기증 재건립

게재 2022-02-02 16:48:53
광주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동상과 숭모비
광주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동상과 숭모비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이근준씨 집으로 옮겨진 숭모비
이근준씨 집으로 옮겨진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빅 데이터 1위

1910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그는 처음부터 무장투쟁론자가 아니었다. 1907년까지만 해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며 교육 운동에 전념했던 애국계몽운동가였다.

1908년 안중근은 아버지 친구의 조언을 듣고 만주의 명동촌·용정·훈춘을 거쳐 연해주 연추(현 추카노보)에 들어가 최재형·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동의회의 의병장이 되어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 1909년 2월(음력)에는 11명의 동지와 함께 약지를 잘라 하늘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이라 불리는 '단지동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1910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을 물어 이토를 격살했다.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은 2018년 빅 데이터 검색 압도적 1위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다.

안중근 의사 숭모비, 광주공원에 최초 건립

안중근 의사는 살아생전 남도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남도 땅 곳곳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전국에서 가장 많다. 1955년 장흥 장동면에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전국 최초의 사당인 해동사(海東祠)가, 1961년 광주공원에 전국 최초로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가 건립된다. 그리고 광주 중외공원과 상무지구 시민공원, 장성 상무대, 함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장흥 정남진 등에 안 의사 동상이 세워진다. 왜 광주·전남에는 안 의사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을까? 이는 안중근 의사가, 남도인들이 목숨 바쳐 실천했던 항일·독립의 상징 인물, 즉 멘토였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4·19혁명이후 결성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창숙)는 1961년 12월 3일 남도의 명승 무등산 끝자락에 위치한 광주공원에 이미 언급한 안 의사 숭모비를 세운다.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였던 심산 김창숙이 비문을 쓰고, 진도 출신 소전 손재형이 '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라 새긴다. 숭모비는 높이가 2.7미터, 무게가 5톤 정도의 엄청난 크기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결성된 전국적인 기념사업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최초의 안 의사 숭모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왜였을까? 그 단서가 안중근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던 심산 김창숙이 쓴 다음의 숭모비 비문에 보인다. "……나는 이 천하의 의사로서는 안중근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남방의 명승지로서는 무등산보다 더 으뜸가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 이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이 호응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비석에 기록을 실은 자는 늙은 앉은뱅이 김창숙이다."

비문의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에서 보듯, 안 의사 숭모비 건립에 가장 앞장선 분들이 광주·전남의 유림이었다. 즉, 남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명승지 무등산 끝자락에 위치한 광주공원이 건립지로 선택된 이유였다. 일제 강점기 광주공원 정상에는 일본 왕의 시조신과 메이지(明治)왕을 모신 신사가 있던 곳이었다. 안 의사 숭모비를 광주공원에 건립했던 것은 일본 정신, 일본혼을 뿌리뽑기 위한 의도도 엿보인다.

안의사 숭모비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분 중 한 분이 1955년 장흥에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를 설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안홍천(安洪天)이었다. 해동사 입구에 서 있는 '의산 안홍천추선기적비(義山安洪天追先紀蹟碑)'에는 "별도로 사당을 짓고 안중근 의사를 모시었고, 또 안 의사의 비를 광주공원에 세운 것 또한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과 의기를 중시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안홍천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은 광주의 문인 정규종이 남긴 『송남유집(松南遺集』의 안의사숭모비창립사실기(安義士崇慕碑創立事實記)에서도 확인된다. 실기에는 "……이 역사는 오로지 남도의 많은 선비들이 협찬함에 있었고, 많은 선비들이 협찬했음은 단체의 업무를 맡아 본 여러분들이 힘을 다해줌에 있었다. 유사(有司)의 힘은 박정규, 안홍천 두 어른의 진심에서 나온 정성에 의해서이며, 두 어른이 정성을 다한 것은 제봉(고경명) 선생의 정령(精靈)이 실로 그렇게 한 것으로……"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1961년 12월 3일 건립된 안 의사 숭모비는 시민회관이 건립되면서 1971년 성거사지 5층석탑 위쪽으로 옮겨진다. 일제가 일본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충혼비가 세워졌던 그 자리였다. 성거사지 석탑 뒤쪽으로 옮겨진 숭모비는 한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중외공원이 만들어지자, 다시 중외공원(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진다. 이는 광주시 홈페이지에 "안중근 의사 숭모비는 1987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졌다"고 적혀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중외공원으로 옮겨진 안 의사 숭모비는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돌연 사라진다.

안중근 의사 숭모비, 중외공원에 재건립 된 사연

1987년 중외공원으로 이전된 안 의사 숭모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은, 전국적으로 일제 잔재청산 및 항일열사를 기리는 사업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해였다. 이때 행해진 친일청산의 상징은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였다.

광주에서도 곡성 출신인 안학선을 회장으로 하는 안중근 의사 동상 추진위가 구성된다. 동상은 조각가인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의 김대길 교수가 권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하였고, 조각상의 글자 '안중근 의사상'은 서예가인 장전 하남호가 썼다. 국내에 제작된 권총을 든 안 의사 동상은 최초다.

그런데 동상 건립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예산이 부족하여 새로운 좌대(座臺)을 만들 수 없었던 동상 추진위는 숭모비의 좌대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좌대 위에 서 있던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가 내려지는 수모를 당했고, 숭모비가 내려진 자리에 권총을 든 안 의사 동상이 올라갔던 것이다. 숭모비는 내려진 후 동상 뒤 언덕에 세워두었다고 하는데,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24년이 흘렀다.

전남일보는 2019년 2월 25일자 1면에 안중근 의거 110주년을 맞아 '2019년 대 역사의 해 전남일보 특별 기획'으로 "전국 제1호 광주 안중근 숭모비가 사라졌다"는 제목을 뽑고, 잃어버린 숭모비를 되찾아 다시 건립해야 한다는 기사를 냈다. 그리고 3월, 24년 전 사라진 후 행방이 묘연했던 '전국 제1호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전남 나주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다. 자칫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숭모비를 다시 찾기까지는 '매의 눈'을 가진 나주 다시면에 거주하던 이근준(47)씨의 공이 컸다.

이근준씨는 3년 전 고향인 나주 다시면에 주택을 신축하던 중 조경석이 필요해 금천면의 한 석재상을 찾는다. 조경석으로 쓸 돌을 구하기 위해 석재상 뒤 야적장을 살피던 이씨는 돌무더기 속에 반듯이 누워있는 비석에서 한문 전서체로 새겨진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순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비석을 기억 속에서 잊고 있던 이씨는 2월 25일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나주의 한 식당에서 '사라진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찾는다'는 전남일보의 신문 기사를 정말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이근준씨는 3년 전 본 비석이 안 의사 숭모비일 것으로 확신하고 다시 금천면의 석재상을 찾았는데, 다행히도 숭모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틈틈이 비문 글씨를 컴퓨터로 옮겨주는 일을 하고 있는 이씨는 석재상에서 비석을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비석에서 '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대한의사안공중근 숭모비)'라는 비명을 확인한 이씨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로 사진을 보냈고, 안중근 의사 숭모회는 '잃어버린 숭모비가 맞다'고 답신을 했다.

이근준씨는 돌무더기 속에 비석이 계속 방치돼 있으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3월 21일 자비로 숭모비를 매입하였고, 이후 광주광역시에 기증했다.

잃어버린 숭모비가 발견되자 광주광역시는 안중근 의사 숭모비 재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숭모비가 마지막 위치했던 중외공원 안중근 동상 곁에 재건립하기로 결정한다. 재건립 부지로 광주공원과 광주향교 등도 거론됐지만, '집적화'와 '시너지 효과'를 위해 현재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세워져 있는 중외공원으로 의견을 모은 결과였다.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된 최초의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가 안중근 의거 하루 전날인 2019년 10월 25일 중외공원에 재건립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중외공원에서 사라진 지 24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