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9> "겨울 바람 속 해녀들의 숨비 소리가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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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9> "겨울 바람 속 해녀들의 숨비 소리가 흩날린다"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부대각 전설이 있는, 제주올레 20코스(17.6km) 김녕에서 하도올레까지
  • 입력 : 2022. 01.27(목) 17:26
  • 편집에디터

해녀벽화. 차노휘

바람의 길

제주올레 마무리 여행을 떠났다. 2020년 연말에 시작했으니 거의 1년 넘게 걸었던 셈이다. 일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냈기에 일상의 활력소 같은 걸음이었다. 제주도 내에서 걷는 코스가 1부터 21코스라면(7-1, 14-1 포함 총 23코스) 제주도 부속 섬인 우도(1-1), 가파도(10-1), 추자도(18-1)를 더하면 총 26코스가 된다. 도상거리 425m이다. 빈번하게 다니다보니 조력자 역할을 하는 분들이 생기기도 했다. 제주도 모 고등학교 모 회 동창회 모임 회원들이다. 친교로 일주일마다 걷기를 하는 단체인데 몇 년 전 영실에 함께 다녀온 뒤부터 인연이 되어 간혹 제주도로 떠나기 전, 코로나 상황의 제주도 소식을 전해 듣거나 날짜가 맞으면 함께 걷기도 했다. 이번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는 올레도 함께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내 코스에 맞춰주었다는 말이 맞다. 함께 걸으면 좋은 점은, 출발지점까지 자동차로 움직일 수 있고 제주 소식을 길을 걸으면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날도 제주시내에서 김녕서포구로 향하는(40분정도 걸리는 거리) 중간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로 김밥 한 줄 씩 포장하고 따뜻한 어묵으로 몸을 데우고는 걷기 준비를 했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었고 출발지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제법 거칠었다.

제주올레20코스는 제주북동부 해안을 끼고 약 18km를 걷는 길이다. 오름이 없어서 난이도가 높지는 않지만 여름에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겨울에는 온전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걸어야 한다. 거친 바람을 따라 현무암 돌담이 즐비한 마을을 들어섰다가 또다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와서 김녕해수욕장의 높은 파고와 마주했다. 김녕리는 땅이 넓지만 밭으로 쓸 수 있는 땅이 적어 예로부터 마늘, 양파 등의 밭작물 외에도 소라, 전복, 톳, 우뭇가사리 등의 해녀가 수확하는 해산물이 마을의 주요한 소득원이라고 한다. 이 길은 바람의 길일뿐만 아니라 척박한 환경에 살아야하는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해녀의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벽 곳곳에 해녀가 그려져 있었다.

성세기태역(잔디)길을 접어들었을 때는 바다를 따라 길이 이어지는데도 바람에 따라 길이 달라지고 있었다. 마른 긴 수풀이 바람에 따라 길을 드러냈다가 감췄다가 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왕은 단연, 행원리 바람이었다.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도 바람을 맨 처음 맞는 곳이 행원이다. 그래서 풍력발전기가 많다. 멀리에서는 마치 풍차처럼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인접한 곳에서 본 그것은 엄청난 규모와 소음에 압도당하곤 한다. 해안가를 벗어난 밭길은 평화롭다. 겨울에도 푸른 밭. 수분 함량이 많고 단 겨울 당근이지만 인권비가 비싸서 그냥 버려둔 곳도 많단다.

당근 풍년. 겨울만 되면 상가 도로에 모래 둔덕을 만든다는 월정리 해수욕장 바람. 모래를 덮는 긴 보. 20코스 중간 스탬프가 있는 행원포구. 행원포구는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 온 광해군이 제일 처음 기착한 곳이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광해군 기착지이다. 걷는 것 자체가 이야기인 이곳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것은 조선시대 거인 장수 부대각이다. 일행 중 한 분의 말을 정리해서 적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뱅듸길. 차노휘

거인 장수 부대각

부씨는 제주도의 소수 성씨다. 옛 문헌에 따르면 제주에 제일 먼저 거주했던 성씨는 고(高), 양(良), 부(夫)씨다. 현재 제주 부씨의 숫자도 양씨나 고씨에 비해 현저히 적다. 부씨 집안에 모시는 조상신이 있다. 부대각이다.

조선 인조 4년(1626) 평대리에서 사는 부씨 부인은 하늘에서 황룡이 내려와 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쌍둥이를 낳는다. 쌍둥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이들의 몸집은 어른만큼 컸다. 어느 날 아버지는 쌍둥이에게 들판에서 소를 돌보라고 시킨다. 우연히 들판에서 노는 것을 본 이후로 그는 걱정에 휩싸인다. 소들을 공처럼 던지고 받으면서 놀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이 장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들들의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예부터 장수의 표지는 겨드랑이에 돋은 날개, 즉 장수가 성장한 뒤 타고 다닐 용마이다. 하지만 대개의 아기장수는 역적이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버지는 역적이 되어 가족이 말살 되느니 자식만 희생시키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부모가 합심하여 날개를 없애기로 한다. 쌍둥이의 생일, 아이들을 잘 먹이고 재운 뒤 먼저 작은아들의 한쪽 날개를 인두로 지진다. 순간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난 큰아들이 훨훨 날아가 버렸다. 작은 아들은 형을 따라 마당까지는 날아갔으나 한쪽 날개가 잘려 더는 갈 수 없었다. 이 작은 아들이 훗날 부대각이 된다. 부대각의 본명은 부시흥.

무인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 4년(1678)에 겸사복장에 올랐고 훗날 통정대부 만호를 제수했다.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날개가 잘린 것이 비참한 최후의 복선이라도 되듯 제주목사에게 제거된다. 그 당시 제주목사는 명성이 자자한 부대각을 죽이려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부대각의 배가 제주도로 들어오자 이때다 싶어 수장시켜버린다. 지금도 평대리 중동 해안가 도깨비동산에 가면 '부시흥망사비'가 있다. 전체 이름은 '통정대부만호부공시흥망사비'.

부대각의 허망한 결말에 내가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이야기를 들려준 일행 중 한 분이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결말은 좀 허망할지 모르지만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 같지 않나요? 적은 늘 가까이 있잖아요? 질투와 시기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죽이니까요."

평대리의 옛이름은 '벵듸'이다. 벵듸는 '돌과 잡풀이 우거진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이름으로 유추해본건대 이곳 또한 기름진 땅이 없기에 풍요로울 수 없는 곳이었다. 강인한 힘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 이런 곳에 힘이 장사인 사람이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부대각의 전설로 더욱 부풀려졌을까.

길은 잠시 바닷바람을 피할 수 있는 평대리 옛길로 들어섰다가 세화리로 이어졌다. 세화 오일장이면 장터에서 국수 한 그릇 먹고 싶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코로나와 겨울바람이 휩쓸고 있는 세화오일장의 스산함을 거쳐 종점인 해녀박물관으로 향했다. 바람 소리 속에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듯했다.

당근밭.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