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반려견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반려견
  • 입력 : 2021. 03.04(목) 11:23
  • 편집에디터

[수원=뉴시스] 김종택기자 = 2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한 공원에서 시민들이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있다. 2021.01.24. jtk@newsis.com

반려(伴侶)는 무엇일까. 흔히 부부를 일러 반려자라 한다. 짝이 되는 사람, 짝이 되는 동무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인간의 영육이 반쪽이기에 짝을 만나 완성을 이룬다는 동양적 사고가 숨어 있다.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겠지? 반려는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요 부인이며 가족이고 동무다. 짝과 더불어 있어야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반려견을 가족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자신의 인장과 신의 이름을 새긴 은반지를 갖고 있었다. 왕은 그 반지의 힘으로 모든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고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자 그 반지는 '문이 여려 겹인 신전'에 숨겨졌다. 스텐리 코렌의 '개는 어떻게 말하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그는 이 전설을 말하면서 1500년경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일기장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능변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허구이기 쉽고, 늘 공허하다. 동물은 한정된 것밖에 말하지 못하지만, 그 내용은 진실하고 유용하다. 큰 허구보다 작지만 진실한 편이 낫다." 또 장 그르니에는 '어느 개의 죽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대 이집트의 지하 묘지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격리되었다. 그것은 동물들을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찬미하기 위해서였다. 따오기, 황소, 고양이, 개, 각각의 동물들은 종류에 따라 그들만의 구역을 지니고 있었다. 그곳의 동물들은 '미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인간에겐 양립 불가능하지만 동물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신의 속성들을 상정하고 있었다. 우주에 활기를 주고 이해할 수 없는 단속적인 말로 힘과 지혜, 그리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속성들을." 그래서일까. 개들의 제한된 언어 인식이나 반응들이 사실은 인간의 허영보다 훨씬 에덴동산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혹시 솔로몬이 짐승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반지를 숨긴 신전을 우리들의 반려견이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반지의 제왕처럼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우리들의 반려견을 앞세우고 달려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코가 없어져버린 이브의 타락한 후예들

올리버색스는 그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매우 중요한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다. "냄새로 가득 찬 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그런 세계였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느낌이었어요. 순수한 지각의 세상, 모든 게 선명하고 생기 있는, 자족적이고 충만한 그런 세상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든답니다." 그는 또 말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후각에 대해 인간이 성장하고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된 '희생양'이라고 쓴 적이 어려 번 있다. 그는 인간이 직립을 하고 전생식기 단계의 원초적인 성욕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후각도 함께 억압당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시각이 지나치게(혹은 병리학적으로) 예민해지는 현상은 성도착증, 물품음란증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며 퇴행이나 도착(倒錯)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실제로도 보고되어 왔다. 개가 깜깜한 밤에도 귀신을 본다고 시각적인 측면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후각이 중심일 수 있다. 저 송알송알 땀에 차 벌름거리는 코를 보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인류는 시각과 후각과 그리고 총체적인 언어마저 폭파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들의 반려견들은 능청맞게도 주인과 교감하는 척하면서 에덴의 숲 어딘가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본원적 감각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에덴의 풍경들을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형제보다 반려견의 죽음이 더 슬픈 이유

동물행동학자 칼 폰 프리쉬는 꿀벌의 언어가 무리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 발전했다고 말한다. 정찰벌은 꽃이 있는 곳을 발견하면 무리에게 그 위치를 알린다. 마치 춤을 추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8자를 그리듯 둥지의 벽이나 바닥 위를 빙글빙글 돈다. 이때 움직이는 패턴이나 속도, 그리고 그 방향을 통해 먹이가 있는 방향과 그 양을 전한다. 그들은 움직임의 방식으로 먹이가 있는 장소가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식으로 거리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준다. 스텐리 코렌이 소개해준 내용이다. 혹시 인간은 꿀벌보다 아니면 개보다 미개한 혹은 본질로부터 괴리된 파편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또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이 단어를 갖게 된 것은 개와의 관계 덕분일지 모른다. 사냥감을 쫒는 데 개를 이용하게 된 사람들은 미미한 냄새까지 구분하는 기능은 필요 없게 되었다. 사람은 보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얼굴로 진화되고, 그럼으로써 다양하고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를 대신하여 냄새를 맡는 역할을 해준 개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앰비로스 비어스(미국의 단편작가)는 '개란 세상 사람들의 넘쳐흐르는 숭배를 미처 다 받을 수 없는 신이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신적인 존재다'라고까지 말했다. 켄돌란-델베치오에 의하면, 서로의 언어를 말하고 알아들을 순 없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가족과 이야기하듯이 자연스럽게 반려동물과 이야기한다고 한다. 많은 반려인들이 반려동물의 기분과 특정한 욕구까지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반려동물이 행복할 때, 신났을 때, 걱정할 때, 낭패감을 느낄 때, 화났을 때, 놀랐을 때, 궁금할 때, 배부를 때, 기분이 안 좋을 때, 화장실을 치워야 할 때를 안다. 거의 텔레파시 수준의 이해력을 경험한다. 정서적 친교에 더해 많은 이들이 사람들과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신체적 친교를 반려동물과 경험한다. 마치 부모가 아기를 보살피는 모습과 유사하다. 반려동물과의 이 놀랄만한 정서적, 신체적 친교는 드문 수준의 친밀함을 발생시킨다. 이토록 친밀하고 일관적인 관계를 잃게 되어 발생한 상심은 부모나 가족의 상실에서 발생한 상심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감정적 신체적 친교로서의 친밀함이 곧 상실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 가족들보다 감정적 신체적 접촉이 잦은 혹은 거의 감정적인 스킨십으로 교감하는 반려견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커뮤니케이션하는 언어와 몸짓과 생각들에 대해. 그것의 온전함 혹은 총체적인 것들에 대해.

남도인문학팁

반려견의 속성

개가 얼마나 친밀한 존재이고 심성적 존재인가를 장그르니에는 이렇게 표현한다. 개의 부류는 <친밀감>을 속성으로 한다. 인간의 친구인 개, 인간이 얻은 가장 고상한 피정복물인(동맹관계로 바뀌었지만) 말, 그리고 (흔히 무고한 희생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기까지 하는) 비둘기, 이 동물들만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은 없다. 토끼를 비롯한 다른 몇 동물들도 이 부류에 포함시키자. 인간은 친밀감을 열망하는데 이는 친구로서의 남자, 어머니로서의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친밀감이라는 것이 대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한 이들 사이에서도 반목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부류의 동물들이 지닌 특성은, 인간들이 함부로 인간만의 속성으로 분류해놓은 <인간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온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개(犬)적인 온정>도 이야기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25일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한 시민이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있다. 2021.01.25. mangusta@newsis.com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