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벽사진경(辟邪進慶) 마당밟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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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벽사진경(辟邪進慶) 마당밟이
  • 입력 : 2021. 02.04(목) 11:02
  • 편집에디터

1961년 9월 26일 전남농악 창덕궁 후원-김주현 제공

북소리 둥둥 징소리 꽝꽝/ 장구는 동당동당 각(角)은 뛰~뛰/ 깃발은 펄럭펄럭 춤은 사뿐사뿐/ 짐승 얼굴 사납고 호랑이 모자 드높네/ 집뜰 우물 부엌에서 우렛소리 땅을 울리며/ 나아갔다 물러났다 조수처럼 분주하네/ 문호(門戶)의 신령께 새로 치성을 더하니/ 숲과 시내 도깨비들 도망가기 바쁘네/ 종규(鍾馗)가 눈동자를 움켜쥐고 서서 먹고/ 피를 뿜어 불 만들어 온몸을 태우네/ 귀신도 간 있다면 떨어지고 말았을 터/ 살려달라 애걸하며 머리를 조아리다/ 후다닥 정신없이 문밖으로 도망쳤나/ 천지가 말끔하고 달과 별이 찬란하네/ 징을 치고 손 흔들어 자른 듯이 그치니/ 장사들은 진을 깨고 노래도 멈추었네/ 그제야 부엌 구석에선 삽살개가 짖어대고/ 사람 떠난 빈 울에는 적막함이 더하네

마치 현장을 보는 듯 소상하다. 광양사람 황현의 '매천집'(권4)에 나오는 내용으로 1906년 구례에서 행해진 정월 대보름 마당밟이 풍경이다. 북, 징, 장구는 물론 여러 깃발들이 보인다. 각(角)은 짐승의 뿔로 만든 나팔이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종묘제례의 아헌례와 종헌례에 연주하는 정대업(定大業)에서 대각(大角)을 사용했다. 짐승얼굴은 탈바가지를 말하고 호랑이 모자는 농악의 대포수다. 대개 호랑이 가죽을 둘러쓰거나 호랑이 형상의 거창한 모자를 만들어 쓰고 양손에 지휘봉과 나무로 만든 총을 든다. 탈을 쓴 사람이나 대포수 등을 포함하여 지금의 농악에서는 잡색이라 한다. 축귀(逐鬼)가 본래의 주된 기능이기에 탈을 쓴 이들이 많았을 텐데 지금은 음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종규(鍾馗)는 중국에서 유래했다. 역귀나 마귀를 쫓는 신격의 하나다. 당나라 현종이 꿈에 본 형상을 오도현에게 그리게 하였다는데 이를 문에 붙여 악귀를 막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우리도 이를 받아들여 단오 부적으로 붙여둔다. 귀면(鬼面) 혹은 치우(蚩尤)의 형상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민화(民畵)라 부르는 양식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우레소리와 같은 마당밟이의 울림을 듣고 도깨비들이 도망가기 바쁘다는 묘사도 흥미롭다. 문지기 귀면이 또한 도깨비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출입을 요청하는 '문굿'이 등장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면 집 뜰, 우물, 부엌에서 마치 우레처럼 풍물을 울린다. 각각 철륭(청룡이라고 하는 지역도 있다)굿, 샘굿, 조왕굿 등으로 부른다. 줄지어선 행상들과 관련 노래(고사소리)들을 곁들이긴 했지만 1세기 전 마당밟이의 풍경이 대체로 지금과 유사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북(소리)이 마당밟이를 시작하거나 이끄는 악기이고 징은 관련의례를 끝내는 악기다. 이외에도 마당밟이의 맥락을 엿볼 수 있는 문헌들이 꽤 있다.

마당밟이,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

지난번에 동서부의 농부들과 보름날 밤에 회포를 풀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연일 날씨가 추워 자못 그 기약을 지키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이 저녁에 이르러 날씨에 다소 화기가 있고 달빛도 정히 고왔다. 갑자가 금혁(金革)이 울리는 소리가 삼문간에서 뇌성처럼 들려 나는 간숙당으로 나가 앉았다. 보니 동부는 필출기(畢出旗)를 세우고 서부는 두복기(斗覆旗)를 세운 채 정정히 광장 좌우에서 맞서고 있다. 징, 북, 나발을 두드리고 부는 소리, 절풍(折風)과 전립(氈笠)을 돌리는 모습이 넓게 좁게 느리고 빠르게 서로 연이어 이뤄졌다. 두 어린이가 어깨 위에 올라 춤추는 것이며 6명의 광대들이 허리를 끊어지게 하는 놀이가 이뤄졌다. 모두 가히 잘하는 나유(儺遊)들이다.

1899년 오횡묵이 여수 군수 때 여수농민들의 마당밟이를 보고 읊은 장면이다. 오횡묵은 지금의 신안군인 지도군수와 여수 군수를 비롯해 정선 군수 등 여러 지방의 관리를 역임했는데 그때마다 총쇄록(叢瑣錄)이라는 귀한 자료를 남겨두었다. 관청의 일은 물로 안팎의 다양한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기록이다. 금혁(金革)은 쇠붙이와 가죽붙이의 악기들을 말한다. 북은 징에 대응하고 꽹과리는 장구에 대응한다. 근자의 일이지만 이 네 악기만을 활용해 만든 음악을 '사물놀이'라 한다. 이 장르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만들어 소개하겠다.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자기 공동체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들고 겨루는 형국이다. 여수의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장단과 노래 등으로 겨루기 하는 양상들을 추적해볼 일이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강진의 농기싸움 등이 전형적이다. 지금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다양한 버전의 '굿놀이'는 사실 이편과 저편이 나누어 대응하는 겨루기의 성격이 강했다. 의례적 기능이 강하면 '제사'나 '굿'으로 놀이적 기능이 강하면 '축제'나 '놀이'등으로 호명했을 뿐이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꽹과리는 작은 징이라는 의미에서 소금(小金)이라 한다. 예컨대 충무공 이순신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지내던 의례인 둑제(纛祭)나 종묘제향 등에 사용하던 악기가 소금이다. 본래 제향에 사용할 때는 채색한 용머리를 달고 붉은색을 칠한 자루에 매달아 나무망치로 쳐서 연주를 했다. 붉은색 끈으로 손잡이를 만들어 연주하는 것은 징(鉦)과 한가지다.

마당밟이는 지신밟기와 혼용한다. 뜻이 같다는 말이겠으나 세부적으로 추적하면 따져 물을 일들이 많다. 농사와 관련된 두레농악 등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농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남도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 중에는 목포대 송기태교수의 업적들이 돋보이고 한예종 손태도 교수의 해석도 참고할만하다. 수많은 기원설이 난무하지만 정초 마당밟이의 주요한 기능을 한마디로 말하면 벽사진경(辟邪進慶)이다. 오횡묵이 말한 나유(儺遊)가 곧 궁중과 지방관청에서 행하던 나례희(儺禮戱)요, 민간에서 행하던 마당밟이다. 모두 악귀를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100여 년 전 구례와 여수에서 갖가지 탈바가지를 쓰거나 꿩털 꽂은 절풍과 전립을 쓰고 이편저편 나누어 겨루기 놀이와 의례를 하던 이유다. 이를 그려서 붙이면 민화(民畵)요, 글씨로 써서 붙이면 예컨대 입춘첩(立春帖)이며 노래로 부르면 고사소리가 되는 것이다. 북소리 없이 치루는 설날이 설마 이번이 처음이랴. 코로나 앞세워 흰소의 해 맞이하는 마음 천근만근이다. 비록 가족끼리 만나지 못하고 징소리 북소리 우레와 같이 울리지는 못하지만 심중의 우레와 뇌성마저 울리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이미 비대면의 언택트(Untact)가 아니라 온라인으로 접목하는 온택트(Ontact)시대를 맞이했다. 벽사진경의 방식을 달리해야 할 시대 새로운 풍속을 재구성할 때가 온 것이다. 신축년 설날이 시작이다.

남도인문학팁

온택트(Ontact) 벽사진경(辟邪進慶)

벽사진경의 풍속을 추출하면 수백 가지가 나온다. 정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쁜 것 몰아내고 경사스러운 일 맞이하는 데 설날이 따로 있고 추석이 따로 있겠는가. 문제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의 대응방식이다. 기왕의 대면방식 그것도 운집하는 형태의 풀이방식이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개별 주체들이 온라인으로 만나고 혹은 분산하는 방식으로 만나는 새로운 모델, 여기에 일종의 해답이 있다. 순천시의사협회장 서종옥 원장은 우선적으로 전남지역 코로나 대비전략을 세운다더라.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는 당연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With 코로나'라는 것. 불가피하게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할 시대를 명료하게 설정했다는 뜻이리라. 어디 이것이 의료에만 그치겠는가. 자영업자를 포함해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은 이른바 문화예술인들의 출구가 요원하다. 그래서다. 흰소의 해 나도 문화설계에 들어간다.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는 물론 코로나와 함께 하는 문화정책이 오히려 긴요하기 때문이다.

곡성읍 풍물단-김주현 제공

여수묘도 달집태우기-여수시청 제공

여수삼동매구-손웅 제공

영광우도농악 상쇠부포놀음-최용 제공

영광우도농악 잡색-김주현제공

전남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잡색-김주현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