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장성이 낳은 청백리,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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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장성이 낳은 청백리,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선비, 지지당 송흠||청백하고 검소 ‘삼마태수’라 널리 알려져||일곱번 청백리에 녹선, 청렴·효행 아이콘||관수정 뜰아래 가훈비 남겨 ‘忠·孝’ 교육
  • 입력 : 2020. 10.27(화) 16:12
  • 편집에디터

송흠 가훈비

조선 전기의 문신 송흠(宋欽)이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에 있는 지은 정자. 1984년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됐다

지지당 송흠 묘소.

관수정 현판

송흠의 또 다른 이름, 삼마태수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인데,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짊과 의로움(仁義)이 넘쳐야 청백리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가 진짜 청백리다.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과 의정부의 검증 절차 외에도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최고 수장들이 추천, 심사하여 통과되어야만 했다. 어려운 심사를 거쳐 청백리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는데, 송흠은 그 청백리에 다섯 번이나 뽑힌다.

송흠(宋欽, 1459~1547)은 보성군수를 시작으로 옥천·여산군수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낸다. 그는 부임지에 갈 때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체면이나 위풍을 도외시한 채 언제나 말 세필만 받았다. 당시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지로 나갈 때나 임기가 끝날 때 감사의 표시로 보통 그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송흠은 새로 부임해 갈 때 본인과 어머니, 아내가 탈 말 3필만 받았다. 그런 송흠을 고을 사람들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렀다. 삼마태수, 이는 청백리 송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송흠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말 세필만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목민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흠이 삼마태수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지지당유고』에 나온다.

초당 허엽이 말하기를 응교 최부는 나주 사람이요. 정자 송흠은 영광사람이다. 같은 시대(성종)에 옥당에서 다 같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서로의 거리가 15리였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라고 대답하였다. 최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그대의 집까지였는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단 말인가?" 하고 조정에 돌아온 즉시 그 뜻을 아뢰어 파직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와서 사직 인사를 하니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도 마땅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 하였다.

성종 말년 송흠은 최부와 홍문관에서 함께 근무했다. 최부는 송흠의 5년 선배였지만, 과거는 10년 빨리 합격했다. 최부는 정4품 응교(應敎)였고, 송흠은 정9품 정자(正子)였다. 말단 정9품이던 송흠은 초임발령지에서 동향 선배를 만났으니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둘이 휴가를 받았고, 송흠은 나주에 사는 최부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큰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송흠은 다섯 번이나 청백리에 선발된다. 송흠이 최부의 멘토였던 셈이다.

삼마태수라 불린 송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 군수를 간청함)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 6조 판서)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도내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그가 호로 삼은 지지당(知止堂)의 뜻이 멋지다. '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노자』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 하였고, 『대학』에도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知止而后 有定)"이라 하였다. 지지당 송흠은 멈출 줄 아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살았다. 오늘 그가 존경받는 이유다.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이 온몸으로 실천했던 가치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영정

송흠의 흔적을 찾다

'효'와 '청렴'의 아이콘이 된 지지당 송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말년에 머문 두 정자, 관수정(觀水亭)과 기영정(耆英亭)을 찾아보아야 한다.

장성에서 함평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가다 삼계면 사창 4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읍내로 진입, 사창초등학교에서 우회전하여 삼계천(옛 용암천)을 따라 1킬로미터 쯤 가면 천방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마을 입구 좌측에 관수정이 있고 기영정은 사창과 관수정 중간쯤에 있다.

관수정은 중종 34년(1539) 병조판서직을 사직하고 내려와 선방산 자락에 세운 정자다.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876년 그의 10대 후손인 송익좌가 중수하였고, 6·25동란으로 불에 타자 1955년 다시 지은 것이다.

관수정에는 송흠의 원운(愿韻) 한시(漢詩)와 '관수정기' 등을 비롯 김안국, 소세양, 양팽손, 송순, 임억령, 김인후, 유사 등 당대 쟁쟁한 23분의 차운시를 새긴 27개의 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당대 남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곳 관수정에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수정 뜰 아래에 '관수정기'와 '가훈비' 등이 번역되어 새겨 있어, 이해하기 쉽다. '관수정기'에는 "……그 물결을 보고 그 물의 근원 있음을 알고, 그 맑음을 보고 그 마음의 사특함을 씻어버린 뒤에라야 가히 관수(觀水)가 될 것이다.……" 관수정을 지은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송흠이 87세 되던 명종 원년(1545)에 남긴 가훈을 새긴 가훈비도 필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주자의 시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충과 효밖에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저 사람이 사람됨은 다만 충과 효에 있을 따름이다.…… 아! 사람이고서 효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겠는가. 또 사람이고서 충성하지 않는다면 사람이겠는가. 그러기에 효도하고 효도하지 않음과 충성하고 충성하지 않음은 곧 그 사람의 사람답고 사람답지 못한 것이 어떤가를 돌아볼 뿐이다. 생각하노니 나의 자손들은 삼가하고 경계할진저."

송흠이 남긴 가훈의 키워드는 '효'와 '충성'이다. 송흠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여러 번 그만두면서까지 효도를 다한다. 특히 전라도 관찰사 시절이던 1534년, 99세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왕의 윤허를 받고 집에 돌아간 일화는 감동적이다. 그는 101세까지 산 노모를 모시기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본 후 드렸다고 전해진다. 효성이 지극함은 그의 시호인 효헌(孝憲) 속에 그대로 녹아 전한다. 그의 아들 송익경도 청백리로 뽑힌다. 부전자전이었다.

관수정 오른쪽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면 송흠의 무덤이 있다. 무덤에서 본 자연경관이 멋지다.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송공지묘'라 적힌 묘비와, '판중추부사 겸 세자이사 지지당 송선생 묘갈명'이라 새긴 묘갈비가 함께 서 있다. 묘갈명은 서인 소론의 영수인 윤증이 지었다.

송흠의 말년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1543년 중종은 낙향한 송흠을 위해 새로 부임하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를 만나 특별한 명을 내린다. '송흠을 위해 정자를 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라'는 명이 그것이다. 그래서 지어진 정자가 기영정(耆英亭)이다. 기영정의 기(耆)는 일흔살 이상의 노인을, 영(英)은 가장 빼어난 풀을 의미하므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란 의미다.

정자가 지어지자, 1544년 기영정에서는 나주 목사 조희가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 이 자리에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 나주, 영광, 장성, 진원 등 주변 10개 고을의 수령, 지역 선비, 주민 등 수천명의 구경꾼이 모였다. 송흠의 나이 86세였다.

정자 바로 뒤에는 중종이 몸소 지은 글 '어제기영정기(御製耆英亭記)'를 새긴 비가 서 있어, 군신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기리고 있다.

오늘 기영정은 처음 건립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건립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송인수 선생의 10대 후손 송겸수가 1856년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다시 건립한다. 정자 안에는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송인수의 시 '기영정원운'이 걸려 있다. "……서가에는 수 천권의 책이 꽂혀 있고 연세는 높아 지금 86세 춘추라네.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를 자주 이루고 이 단청에 옮겨서 만년을 누리소서"라는 축원시다.

기영정에는 두 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오른쪽 현판은 19세기 문인인 신석희(1808~1873)의 글씨이고 왼쪽 현판은 송인수의 10대손으로 기영정을 재건립한 송겸수의 글씨인데, 두 글씨 다 힘이 넘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