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남도의병역사공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 오피니언

남도의병역사공원

게재 2020-07-26 17:59:37
최도철 미디어국장
최도철 미디어국장

타향에 사는 지인들이 광주를 찾아오면 데려가는 몇 곳이 있다.

무등산이나 기대승의 빙월당, 한국의 으뜸 정원 담양 소쇄원, 가사문학관, 문불여 장성 필암서원, 천불천탑의 불국토 화순 운주사가 주로 가는 곳이다.

간혹 시간이 된다면 조금 먼 나주를 찾아 금성관이나 나주향교, 영산포를 찾기도 한다.

보름 전 주말. 경기도에서만 내내 살았던 '서울 촌놈들' 몇이 찾아와 함께 나주 땅을 밟았다.

전라도는 '왕의 도시' 전주와 '선비의 고을' 나주의 앞 글자를 따 이름을 지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나주는 천년목사골이라 부른다. 고려 성종(983년)때 전국에 12목(牧)을 두었던 때도 이름을 올렸고, 35년 뒤 8목으로 줄인 현종때도 빠지지 않았다. 옹골찬 기개를 간직한 목사고을의 유림들과 양반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이유이다.

강직한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나주 사람들의 절의와 충절은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의기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건재 김천일 선생은 진주성 2차 싸움에서 호남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나 끝내 함락 당하자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기묘사화 때도 나주 출신 유생 11명은 목숨을 걸고 정암(靜庵)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혹독한 매질이었다. 나주 유생들은 미련없이 한양에서 나주까지 맨발로 걸어와 영산강변에 금사정(錦社亭)을 세우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한탄하는 시문을 지었다.

구한말 일제에 맞선 나주의 의병운동도 가열찼다. 1907년 정미의병에서 호남창의회맹소 의병장 김태원과 김율의 영향을 받아 유생들과 평민들이 일어났고, 이어 심수택 의병장이 남평에서 봉기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외에도 김철 선생, 나월환 장군 등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이 많다.

이렇듯 나주는 고려, 조선,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남도 역사문화의 중심이자, 누란에 처한 나라를 위해 의병 활동을 치열하게 펼쳤던 지역이다.

절의의 땅 전라도 어디에 세운다 할지라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최근 남도의병역사공원의 적지로 나주가 선정됐다.

의병역사공원 조성은 의향 남도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호남정신을 오롯이 품어 가르치는 문화 산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