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8화>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선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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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8화>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선 예술가들
-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영웅으로 작품에 담은 예술가들, '장 미쉘 바스키아' ,'뱅크시'
  • 입력 : 2020. 07.08(수) 15:09
  • 편집에디터

최근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진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BLM운동, 그 중심에는 조지 플로리드(Geoge Floyd) 사건이 있었다. 지난 5월 25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경찰들은 비무장상태였고 저항도 하지 않았던 한 시민을 무고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찍었던 동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잠재되어있던 인종차별 문제에 다시금 불이 붙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진1. BLACK LIVES MATTER 시위현장]

[사진1. BLACK LIVES MATTER 시위현장]

"BLACK LIVES MATTER" 슬로건이 처음 등장한 것은 8년전 2012년이다. 17살의 흑인 소년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총을 쏘아 숨지게 한 백인 자율방범대원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시작된 흑민 민권 운동을 말한다. 그 외 비슷한 인종차별적(흑인) 사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동시대의 인종 차별로 인한 무고한 생명을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논쟁과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과거 현대 미술사의 작품들로 살펴보면 37년 전 뉴욕을 분노하게 했던 끔찍했던 사건, 1983년 9월 15일 새벽 뉴욕 아프리카계 그래피티 아티스트 마이클 스튜어드(Death of Michael Stewart)는 지하철역에 낙서 작업을 하던 중 교통경찰들에게 체포된다. 당시 스트릿 문화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경찰들에게 체포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스튜어트가 체포되어 도착한 곳은 경찰서가 아닌 병원 응급실이었다. 체포 과정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스튜어트는 13일 후 결국 사망했다.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경찰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스튜어트는 혼자 흑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튜어트가 도망치려다 넘어지면서 벌어진 일' 이라고 경찰들은 주장했지만, 목격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현장 증언에 따르면 스튜어트가 경찰들에게 아주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뉴욕은 엄청나게 들끓기 시작했다. 부검의가 사인을 심장마비로 추정하면서 사건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가 자꾸 번복되었고, 결국 가장 직접적인 사인은 '신체적 상해(personal injury)'라는 발표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 경찰들은 단 한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은 1980년대 사건으로 잊혀질 뻔 했지만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의 <마이클 스튜어트의 죽음 Death of Michael Stewart, 1983년> 작품으로 역사의 기록되어 증명되었다. 작품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흑인, 그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경찰들,그 위에 '훼손(Defacement)'이라고 적힌 노골적인 문구는 당시 사회의 편견과 시대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며 현대 미술의 두꺼운 벽을 꿰뚫고 있다.

[사진2.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_마이클 스튜어드의 죽음 Death of Michael Stewart_1983_printerest]

[사진2.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_마이클 스튜어드의 죽음 Death of Michael Stewart_1983_printerest]

[사진3/3-1.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_Self-portrai사진(좌),작품(우)]

[사진3/3-1.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_Self-portrai사진(좌),작품(우)]

[사진3/3-1.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_Self-portrai사진(좌),작품(우)]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960년 12월 22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고 3살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와 함께 갔던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의 '게르니카(Guernica, 1937)'를 보고 작품에 매료되어 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10대 시절에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며 고등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등의 회화 스타일을 독학하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낙서 그림은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자가 현실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들어내어 그 속에 억눌린 응어리를 푸는 해독제였는지 모른다. 또한 공개적으로 대놓고 내뱉어 대는 사회적 발언이자 배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바스키아는 기성체계에 대한 반항심으로 시작한 낙서를 자신의 생각을 담아 솔직하게 표현하였고 회화의 영역으로까지 끌어다 놓은 예술가라 하겠다,

1980년대 미국 예술계의 슈퍼스타 검은 피카소라 불리던 바스키아는 미국의 시대와 사회상의 이미지를 티셔츠, 벽, 건물, 엽서 등에 자유분방한 낙서로 그려 표출하였다. 오늘날 그의 작품들이 1,200억원 이상 호가하는 건 현재의 자본주의와 인종 차별 문제까지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마이클 스튜어트의 죽음> 작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바스키아와 스튜어트의 첫 번째 공통점이 흑인이었고, 두 번째 그래피티 아티스트라는 점 그리고 친구였던 키스 해링(Keith Haring) 을 통해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바스키아에게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의미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과거로 돌아가서 17~18세기의 고전 작품에 등장했던 흑인에 대한 인식과 표현은 어떠했을까? 잘 알려진 명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 1865)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도 같이 어두운 색으로 표현된 흑인하녀를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시대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근대의 제국주의 길을 걸었던 결과로 유럽 사회에 많은 다양한 인종이 마네의 작품에 등장하고, 당시 상황의 현실적 묘사를 상징적으로 흑인 하녀를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올랭피아는 '오달리스크라' 말처럼 동양풍(여기서 동양은 아랍 세계를 의미함)의 노출이 심하고 장신구를 화려하게 착용한 거의 나체의 여성이 역시 동양적인 배경에서 그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오리엔탈리즘 계통의 그림을 뜻하고 있다. <올랭피아> 작품 속 누드의 주인공은 그가 살던 시대의 창녀를 모델로 하여 동시대의 인간상을 담고자 하였다. 마네는 현실 속의 여성을 즉, 그녀를 통해 차갑고 세속적인 리얼리티(reality)를 선사하였다.

[사진4. Edouard Manet_Olympia_130.5x190cm_1865_오르세미술관]

[사진4. Edouard Manet_Olympia_130.5x190cm_1865_오르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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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1.(좌) Edouard Manet_올랭피아 확대_1865]

[사진4-1.(좌) Edouard Manet_올랭피아 확대_1865]

[사진4-2.(우) Jean-Michel Basquiat_무제(마네의 올랭피아 하녀 패러디)_1982]

[사진4-2.(우) Jean-Michel Basquiat_무제(마네의 올랭피아 하녀 패러디)_1982]

당시 17세기의 누드화라고 하면 매우 아카데믹한 전통을 따라 이상적인(신화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미학의 제도를 마네의 <올랭피아>는 무차별적으로 뒤집어 놓은 모독 행위에 가까웠다. 마네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소수의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모더니티(Modernity)'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고 칭찬했지만,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신랄한 욕설과 공격을 퍼부었다.

바로크 시대 대표 플랑드르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에서는 어떠한가? 그는 고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명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타오를 듯한 색채와 웅장한 작업들로 바로크 회화의 집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활발한 외교 활동과 흑인 노예제도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시대성을 보여주고 루벤스의 작품 속에서도 아프리카 원주민의 흑인 노예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종(한국 포함)들을 그림에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루벤스에 작품에서 등장하는 흑인 노예들은 슬프고 지쳐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사진5. 5-1. Peter Paul Rubens_흑인 노예(좌), 흑인의 머리(우)_17세기]

[사진5. 5-1. Peter Paul Rubens_흑인 노예(좌), 흑인의 머리(우)_17세기]

[사진5. 5-1. Peter Paul Rubens_흑인 노예(좌), 흑인의 머리(우)_17세기]

최근에는 세계적인 거리예술가 뱅크시(Banksy)가 지난 6월 7일(현지시간) 조지 플로이드(Geoge Floyd) 사건의 메세지를 담은 작품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촛불에 서서히 타오르는 성조기가 벽에 걸려있고, 중앙에는 숨진 플로이드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영정 사진이 놓여있다. 작품은 어둡고 음침하며 인종 차별로 숨진 플로이드를 추모하고 이 사건을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림과 함께 쓴 뱅크시의 게시글은 이보다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 '처음에 나는 입 닫고 흑인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왜 그래야하나? 이 사건은 흑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도 하다.' 고 적었다. 그렇다 이것은 플로이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진6. Banksy's anti-racism vigil inspired by george floyd's death_2020_Instagram/@banksy]

[사진6. Banksy's anti-racism vigil inspired by george floyd's death_2020_Instagram/@banksy]

많은 역사와 시대 속 예술 작품에 나타난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했던 인간의 삶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영웅으로 그려내며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 세상을 바라봤던 예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뱅크시(Banksy).

다소 무겁고 껄끄러운 사회적 문제인 인종 차별에 대한 메세지를 '낙서' 라는 대중적인 장르를 통해 사회 운동과 연결 된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대적 고찰을 독창적인 작품으로 풀어냈기에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가 죽은 지 32년이 지난 오늘날,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020년 우리는 아직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하는 인종 차별 문제와 포스트코로나시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타까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교체되는 과정 속에서 더 많은 사회의 다양성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무의식 속 차별은 인정하지 않을 바른 관점과 기준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의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수많은 사회적 차별에 소외되어 상처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무고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시대적 예술과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며 마주했으면 좋겠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