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5>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5>
혼성과 유동의 시대 치열한 자아 탐구||(5) 동시대 화두‘정체성’ ||1990년대 이후 세계화 맞물려 미술계에서 부각||김수자·서도호·니키 리 등 노마드적 작업 활동 ||중국의 쉬빙, 이주자로서 새로운 언어 창조 작품
  • 입력 : 2020. 06.07(일) 16:33
  • 편집에디터

니키 리 '히스패닉 프로젝트(1998)' 레슬리 통크나우 갤러리 홈페이지

마흔이 되니 사춘기 마냥 실존론적 고민이 생긴다.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건만, 세파에 이러 저리 표류하는 것은 여전하다. 오늘날 시대는 또 어떤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 파울 크뤼첸(Paul J. Crutzen)의 '인류세'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규정하려는 움직임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는 변화에 직면해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기'라는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생존 전략이 공감이 간다. 정착적인 부동 재화는 최소한으로 하되, 아이디어와 경험, 지식 등 유목적인 재화는 최대한으로 소유하기를 권한다. 즉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하며, 하나의 정체성으로 만족하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틈새를 살아가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화된 동시대 미술에서 정체성은 주요 화두로 등장했다. 국가 간 이동과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혼성적 문화 환경에 직면한 작가들은 더욱 밀도 깊게 자아를 성찰하게 되었다.

1994년 유학길에 올라 20여 년 넘게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니키 리는 정체성을 유동적으로 바라본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연작에서 작가는 히스패닉 여인, 여고생, 펑크족, 여피족 등 다양한 계층과 성별, 직업을 가진 그룹 속에 들어가 몇 달 씩 일원으로 지내면서 동화된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 앵글 속에는 그 집단에 완벽하게 흡수된 구성원으로서 작가가 존재한다. 그 전까지 자신을 규정지었던 정체성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다. 니키 리에게 정체성이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물성을 지닌 것이었다.

니키 리가 자신을 해체했다면 중국의 현대미술 작가 쉬빙(Xu Bing)은 낯선 언어를 와해시키고 공통의 언어를 재탄생시킨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인 1990년 정부 감시와 규제를 피해 미국으로 넘어간 쉬빙은 이주민으로 20여 년 간 살았다. 주변인으로의 삶은 민족, 인종,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는 소통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지서'는 이러한 고뇌에서 나온 산물이다. 쉬빙은 1999년부터 '지서' 프로젝트를 위해 7년간 세계를 돌며 표지판, 안내판, 이정표, 온라인 이모티콘, 국제표준화기구 상징물 등 2500여 개의 보편적인 기호들을 수집했다. 개인의 사유체계 즉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언어로 보고, 모두가 해독 가능한 언어이자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다. 또한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란 안정적인 정착이 아닌 유목적인 태도이다. 유동적이기에 오히려 다양한 나라와 도시, 인종과도 연결이 수월하다. 수 십 년 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보따리 작가'김수자에게 보따리는 정리와 시작을 함의하는 오브제이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채비가 가능한 보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1997년 수십 개의 보따리가 실린 트럭을 타고 한 때 살았던 전국 방방곡곡을 11일 동안 다닌 장면을 찍은 '움직이는 도시들, 2727㎞ 보따리 트럭'과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카이로, 런던, 도쿄, 뉴욕, 상하이 등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담아낸 '바늘 여인', 2007년 파리 변두리에서 중심부 사이를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보따리 트럭-이민자들' 등의 작품에서 지구촌과 연결되어 있는 작가를 만날 수 있다.

글로벌 유목 작가인 서도호 또한 집과 호텔 등 정착적인 요소에서 발상을 전환한 가변적인 공간에 천착했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틈새호텔'은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반영됐다.

지구촌 곳곳의 낯선 현장에 자신을 노출시켰던 이들 작가들은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치열하게 붙잡았다. 그들의 이러한 존재론적 수행들은 사진과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시각화·개념화됐다. 어쩌면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는 삶의 비밀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아를 직립케 하는 은밀한 정체성을 지독하게 지켜내는 게 아닐까?

쉬빙 '지서(2003)' 쉬빙 홈페이지

김수자 '보따리 트럭-이민자들(2007-2008)' 김수자 홈페이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