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에 쓰러지다… 첫 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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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계엄군 총에 쓰러지다… 첫 발포
1980년 5월20일
  • 입력 : 2020. 05.19(화) 16:56
  • 양가람 기자
1980년 5월20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 진입한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아침부터 쉼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학교가 휴교했어. 10시에 YWCA 앞에서 만나." 학보사 친구 성민이의 전화를 받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어머니가 몹시 불안한 눈빛으로 문 앞을 막아섰다. 어젯밤 시위대에 합류한 아버지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나가서 아버지 찾아볼테니 걱정마세요." 어머니의 떨리는 어깨를 어루만지고 집을 나섰다.

하룻밤 새 광주는 난장판이 됐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거리엔 이름모를 이들의 신발 수 십 짝이 나뒹굴고 있었다. YWCA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저 멀리 젊은 남녀들이 속옷만 입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던 계엄군이 몽둥이로 그들을 마구 때렸다.

계엄군에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발길을 돌렸다. 대인시장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 중이었다. 계엄군이 던진 최루탄 연기 사이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인 아주머니들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함께 구호를 외치다 혼란을 틈타 금남로로 빠져나왔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성민이를 만났다. 건물 안에서 우리는 준비해 온 종이와 펜으로 시민들에게 돌릴 전단지를 작성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하나 써내려가는데, 손이 떨려왔다.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상계엄 철폐해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시위대의 함성이 점점 커졌고, 최루탄 터지는 소리도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죽기를 각오한 시민들이 목터져라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를 행진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머리 위로 대형 태극기가 펼쳐졌다. 버스와 택시들이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에 진입했고, 시민들도 환호했다. 나와 성민이는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누군가는 우리를 격려했고, 누군가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라며 화를 냈다.

주변이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시위대를 따라 광주역 광장으로 갔다. 광주역 앞 다섯 갈래의 도로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대치했다. 누군가가 휘발유를 넣은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쪽으로 굴려 보냈다. 계엄군이 공포탄을 발사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트럭을 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그때 고막이 찢겨 나갈 듯한 굉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갑작스런 총격에 놀란 시민들은 흩어졌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무릎 아래로 따뜻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내 옆에서 시위하던 성민이가 쓰러져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복부에선 빨간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성민이를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수술 시간이 길어졌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 생각에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끝없는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긴 총성은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들을 끌어 안던 시민들의 절규가 잊히지 않았다. 정신없는 틈을 타 계엄군이 철수했지만, 공포와 슬픔, 분노로 뒤범벅 된 시민들은 깊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방문을 열자 어머니가 슬픈 눈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오늘도 아버지는 집에 오지 않으셨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