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하정호>마흔 살, 껍데기를 벗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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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하정호>마흔 살, 껍데기를 벗을 때
하정호-광산구청 교육협력관
  • 입력 : 2020. 05.17(일) 16:30
  • 편집에디터
하정호 광산구청 교육협력관
"집가이벌가(執柯以伐柯, 도끼가 박힌 도끼자루를 잡고서 새 도끼자루를 벤다.)"는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새 도끼자루를 만들려고 할 때는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도끼자루만 보면 어찌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법칙을 멀리서 찾으려 한다. 삶의 진리는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지난 40년의 우리 삶은 어떠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 삶을 새로이 하려 했을까?

광주민주화운동도 이제 40주년이 되었다. 보란 듯이 성대하게 치르려 했던 기념행사들이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좋은 토론회와 전시 소식들이 들려온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행사를 치르지 못하니, 각자가 선 자리에서 차분히 지난 40년과 앞으로의 40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그 평가와 전망의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이다. 과거를 들추는 것이 오늘을 낫게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요란스런 행사들조차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제도는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우리 삶은 다시 40년 전처럼 곤궁해지고 있다. 손수레 가득 폐지를 모아도 겨우 5천원을 손에 쥐는 어르신이 700명을 넘는다. 노동운동과 들불야학에 투신했던 윤상원을 칭송한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서, 누구의 곁에 있는가? 광주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속살은 또 얼마나 튼실한가?

지난 5월 4일에는 배이상헌 교사의 신원을 요구하는 시교육청 앞 집중시위가 있었다. 도덕 수업시간에 프랑스 단편영화 를 아이들과 같이 보며 토론했다는 게 시교육청이 경찰에 의해 수사의뢰한 이유다. 검찰은 이 사건을 8개월이 넘도록 기소조차 못하다가 결국 '검찰시민위원회'로 기소여부 판단을 떠넘긴 상태다. 교육청 앞에서 시위한 지 300일이 넘는 동안, 문제가 된 수업자료의 영화감독, 프랑스의 최대 교사노조,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 다른 시도의 교육감들까지 광주시교육청의 행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지만, 교육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사건 발생 당시부터 효천중학교의 성고충심의위원회는 배이상헌 교사의 수업이 성비위가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 학교의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교육청의 교권침해가능성을 인정하고 시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심지어 '광주교육시민참여단'에서 교육감에게 "인권을 존중하는 스쿨미투 대응 권고문"을 전달하였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 권고문은 학생과 학부모가 진행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 또 관련 행위자에게도 충분한 소명기회를 제공하고, 객관적 징계 기준을 공론화를 통해 마련할 것, 전문적이고 책임있는 조사기구를 마련하고 숙의를 통해 성비위 여부를 신중히 판단할 것과, 학교가 주체가 돼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협력 체계를 강화하고 매뉴얼 역시 학교 구성원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보완해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어느 하나 놓쳐서는 안 되는 당연한 권고이다.

시민사회와 소통하지 않는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시교육청이 만든 조직이 '광주교육시민참여단'이다. 그 조직이 별도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열 차례 논의하고, 세 차례의 전체 숙의를 거쳐 만든 권고문이었다. 귀 닫고 입 막을 양이면 왜 말하라 했는가. 시민들의 참여가 관료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거나 명분축적용으로 들러리를 세워 정책집행을 돕는 기제 정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교권보호위원회조차 차일피일 미룰 생각이면 교권보호센터는 누구 좋으라고 만들었나. 단순히 전문가나 조직화된 NGO를 들러리 세우고 거버넌스를 이루었다 참칭하지 마라. 시민의 권한 강화와 직접 참여를 통해 지역의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해야 한다. 교육당국이 사법부로 떠넘긴 공이 이제 또 '검찰시민위원회'로 넘어갔다. 공정한 심의를 명분으로 그 면면을 감춘 조직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무혐의 결정,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욕설한 광주지검 검사에 대한 불기소 처분이 모두 여기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조차 검찰의 들러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안목을 새롭게 했다. 부러워하며 내내 쫓아다니기만 해야 할 줄 알았던 소위 '선진국'들보다, 우리가 방역을 더 잘 해내었다. K-팝, K-무비에 이어 K-방역까지.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 삶의 기준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우리 자신에게 있다. 내 양심이 비추어 부끄럽지 않고 이웃에 권할 만하다면 세계 누구에게라도 좋은 일이 된다. '제3섹터'도, '거버넌스'도, '그린뉴딜'도 다 좋다. 진짜로 하고 싶고, 해낼 자신이 있다면. 40년이면 충분하다. 이제는 흉내가 아니라 '찐'이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도 껍데기를 벗을 때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