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호남의 명산 무등산의 참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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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세상읽기> 호남의 명산 무등산의 참억새
한정규 문학평론가
  • 입력 : 2019. 11.11(월) 15:06
  • 편집에디터
무등산은 인구 140여만 명이 넘는 호남의 거대도시 광주를 품에 안은 명산이다. 가을이면 무등산 서석대 남쪽으로 쭉 뻗은 능선의 억새 군락이 빛고을 광주시민의 사랑을 받는다.

얼마 전이다. 증심사, 당산나무, 중머리재, 중봉을 거쳐 서석대 아래 억새 품에 안겼다. 은빛 찬란한 억새를 보며 지난 60여 년 전 그 군락지의 억새를 떠 올렸다.

정상을 발로 딛지 못하고 눈으로만 마주하고 억새와 함께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유인즉슨 멀리는 일제가 남긴 잔재다.

돌이켜 보면 조선 고종 때 민비와 이하응의 권력다툼이 청나라를 러시아를 그리고 일본을 한반도로 불러들여 전쟁을 했다.

그 시기 한반도를 놓고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멀리는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다. 결국 미국과 일본 간에 조선을 두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일본인 가쓰라와 미국인 태프트가 1905년 7월 27일 미국이 일본에게 조선을 지배토록 하되 그 대신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이 지배키로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1905년 8월 12일 일본이 영국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조선이 강대국들의 밀약으로 1910년 8월 29일 일본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 결과 한국이 일본에게 36년간 식민통치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독립했다. 다시 말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된 것도 미국의 영향이었다.

독립이 되고 곧 바로 미국과 중국에 의해 한반도 허리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려 남쪽은 미국이 1948년 8원 15일까지 3년간 신탁통치를 북쪽은 김일성이 중국을 배후에 두고 점거 남과 북 간에 혼란이 계속됐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이 전쟁을 시작 국토는 잿더미가 되고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현재에 이르렀다.

그 때 전쟁을 하면서 미군이 무등산 정산 주위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지 않은 탓에 정상 등산을 제한했다.

지금부터 60여 년 전 1960년 3월 초 일요일이었다. 그해 2월 25일 광주무진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정장래 서용만 조전 박춘웅 그리고 필자가 함께 무등산 등산을 갔다. 그 뒤 일주일이 지난 일요일 또 다시 정장래 서용만 박춘웅 셋이서 무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지뢰를 밟아 폭발 그 사고로 정장래와 서용만이 세상을 하직하고 박춘웅은 다리에 부상을 입은 사고가 일어났다. 그래서 필자에게 무등산은 좋지 않은, 안타까운 기억이 가슴깊이 새겨진 곳이다.

60여 년 전 3월 초의 억새는 때를 잃어서인지 누런 빛깔을 띠고 비스듬히 누어있었으며 그 사이 땅엔 파란 새 삯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2019년 가을의 억새는 그 때 억새와 달리 은빛의 물결이 찬란했다.

꽃이 진 억새들이 멀리 남해 바다에서 비릿한 갯벌 냄새를 듬뿍 머금은 채 불어오는 봄바람에 누런빛을 휘감고 넘실대며 서석대를 찾는 손님을 반겨주었다. 그 때 함께했던 친구들을 떠 올리며 은빛 출렁이는 억새를 바라보았다.

호남의 명산이자 빛고을 광주의 주산인 무등산은 듬직한 자태와 정기로 호남인들을 안고 미래를 향한 꿈을 꾸고 있다. 무등산은 언제 어데서 보아도 듬직하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조선 인조의 넷째왕자인 비운의 용성대군의 태가 묻힌 태봉산과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상 같은 경양방죽을 아우럿다. 그런 무등산의 늠름한 모습은 평화로운 천사와 같아 광주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광주는 학과 용의 형국에 강한 정기를 가진 명산 무등산이 있어 가을이면 울긋불긋한 단풍과 은빛 찬란한 억새가 어우러져 광주 사람들을 더 나아가 호남인을 즐겁게 해 준다. 하늘이 준 축복의 산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