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어촌계와 어업조합, 어촌의 자치조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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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어촌계와 어업조합, 어촌의 자치조직<끝>
  • 입력 : 2019. 07.04(목) 13:03
  • 편집에디터

거문도. 1930년에 어부가 2000명 살았고, 선구점이 20곳 음식점이 41곳 있었던 곳이다. 여수시 제공

어촌, 어촌계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다.

우리나라는 양항과 어장이 많아 어업이 성한 곳이다. 그 결과 바닷가에는 많은 어촌이 산재해 있다. 우리 어촌은 어업을 주업으로 하거나 반농반어로 생업을 영위해 나갔다. 조선시대에 어떤 마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포(浦)'자가 들어가 있는 마을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수입이 좋은 어촌이 많았다. 두 사례를 들어 보겠다.

①고군산도는 만경 바다 복판에 있으며, 첨사가 관할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온통 돌산이고 뭇 봉우리가 뒤를 막으며 빙 둘러 안았다. 그 복판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서 배를 감출만하고 앞은 어장이어서 매년 봄·여름에 고기잡이할 철이 되면 각 고을 장삿배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모여들어서 바다 위에서 잡은 고기를 사고팔았다. 주민은 이것으로 부유하게 되어 집과 의식을 다투어 꾸미는데 그 사치한 것이 육지 백성보다 심하다고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택리지'에 적었다. 현재 고군산도는 새만금 사업으로 육지가 되어 있다. ②조기와 새우젓으로 유명한 영광 염소면(현재 염산면) 사람 가운데 어로와 장사로 제법 돈을 모은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은 돈으로 논밭을 매입했는데, 1779년 상속문서에 40마지기가 보인다. 남은 돈으로 어민에게 사채를 주기도 했다. 영광향교 건물 지을 때 80냥을 희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군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관(軍官) 자리를 얻어 평민에서 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어민들은 '동중규약'을 제정하여 자신의 마을을 운영해 나갔다. 그 규약을 흔히 어촌계라고 한다. 어촌 사람들은 일반 마을의 '동계'나 '촌계'처럼 어촌계를 통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전통시대 어촌계 문서는 좀체 찾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저명 어촌', 전국에서 전라남도가 가장 많다.

우리의 어촌 현황은 일제가 조사하여 1935년에 발간한 '조선의 취락'에 수록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을 보면, 일제는 1929년에 이른바 '저명 어촌'을 조사하였다. 어촌 수의 경우 전남이 57곳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남 33곳이다. 전남에서는 제주도, 여수군, 완도군이 가장 많고, 일본 어민이 거주하는 곳이 43곳, 중국 어민이 거주하는 곳이 19곳이나 되었다. 예를 들면 여수군 삼산면 거문리의 경우 한국인 72호(224명), 일본인 120호(376명), 중국인 2호(5명) 등 184호에 605명의 어민이 살고 있었다. 통계상 일본 어민의 수가 더 많다.

그리고 일제는 1930년에 각도 경찰부장을 통해서 위 어촌의 어종, 성어기, 어선, 어부 등 어업현황, 그리고 용품 상인, 음식점, 작부 등 외부인을 조사하였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거문리의 경우 삼치, 청어 등을 5월 하순부터 11월 하순까지 잡고, 어선이 220척(한국인 40척, 일본인 180척)이고, 어부가 2천명(한국인 1천 600명, 일본인 400명)이고, 용품 상인이 20명(한국인 2명, 일본인 18명), 음식점이 41곳(한식 25곳, 일식 16곳)이고, 작부가 74명(한국인 20명, 일본인 54명)이나 되었다. 어림잡아 거문리 인구가 3천명은 훨씬 넘었을 것 같으니, 거문리는 오늘날 어지간한 면보다 규모가 더 컸음에 분명하다.

어업조합, 전국에서 전라남도가 가장 많다.

일제는 우리 주권을 강탈하고서 한반도에서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어업령을 1911년에 공포했고, 이를 1929년에 조선어업령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 어민은 자신들의 조업지역을 단위로 하여 어업조합(漁業組合)을 설립해야 했다. 조합은 어획물의 공동판매, 어로장비와 생필품의 공동구매, 어업자금의 대부, 수산기술의 양성 등을 목적으로 했다. 처음에는 부진했으나 차츰 증가하여 1925년 말에 조합수가 143개에 이르렀다. 조합수와 함께 판매액도 증가했다. 조합수의 경우 전남이 가장 많은 26개였고, 그 다음이 경남으로 24개였다. 판매액의 경우 경남이 가장 많은 1천 822만엔이고, 그 다음이 전남으로 853만엔이었다. 그리고 어민들은 군 단위로 수산조합(水産組合)을 설립했다.

1931년에 이르면, 어업조합 수가 더 증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남은 61개로, 경남은 39개로 각각 증가하게 된다. 조합원 수에 있어서도 전남이 6만 4천여 명으로 가장 많지만, 어선수나 어획고에 있어서는 경남에 뒤처지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합은 완도군 해태조합으로 조합원 수가 9천 400여 명이고, 그 다음을 차지하는 곳이 제주도 해녀조합, 고흥군 해태조합, 금일 어업조합, 광양군 해태조합, 장흥군 해태조합 순이다. 전국 최대의 단위 어업조합을 전남이 독차지 했다. 이 가운데 '광양해태조합'의 경우 조합원 수가 2천 734명에 이르고, 수확액이 4만 3천여 엔에 이르고 그것을 거의 전량 공동 판매했다. 조합 적립금 가운데 조합원 104명에게 1만 4천엔 정도를 대부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전남의 저명 어촌과 어업조합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이는 전남의 수산업이 전국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조합장, 지역 유지로 행세하다.

조합장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광양해태조합' 이사로 활약한 바 있는 영광 출신 박준규(朴準圭)는 광양금융조합장, 호남은행 목포지점장 등을 거쳐 해방 직후 도민대회에서 전남도 건준의 새 위원장이 되었다.

어업 조합장 가운데 횡포를 저지른 이도 적지 않았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어업조합 분규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가령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에 사무실을 둔 고흥해태조합은 1920년에 금산, 도양, 고읍, 도화, 봉래 등 5면 거주 김 양식업자 2천여 명으로 창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이사가 금산면 유지와 짜고 조합원 동의 없이 3년간 1만여 원을 먹고 1924년에 죽어버렸다. 그러자 1928년 현재 3천 5백여 명에 이르는 조합원의 사활이 걸리게 되었다. 이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 노농청년회, 청년회 등 군내 사회단체는 자신들의 조합원·회원을 금산면 현지에 파견하였고, 조합원들은 일본인 이사에 대한 배척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횡포를 넘어 친일 행위를 한 조합도 있었다. 장흥군 대덕면 회진리에 있는 해태조합의 조합장 한국인 이세옥과 이사 일본인 야마자키 두 사람은 1938년 조합명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용 고사용 기관총 1대를 헌납하기 위해 돈 2천 48원을 휴대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조합장 역임자 가운데는 나중에 친일인사로 분류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부당 회비 납부 거부 운동 등이 완도 등지에서 벌어졌다.

일제 치하에 만들어진 어업조합은 1962년에 제정된 '수산업협동조합법'에 의해 어촌계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흥해태조합의 비리를 보도한 1928년 4월 7일자 중외일보.

거문도 백도. 여수시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