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창작판소리 윤상원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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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창작판소리 윤상원歌
  • 입력 : 2019. 05.15(수) 13:06
  • 편집에디터

광주 광산구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명창 임진택의 판소리 토크콘서트 '오월의 노래' 한 장면. 광산구 제공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 (사)들불열사 기념사업회 제공

사람들이 모여든다/ 휑하니 널려있는 공동묘지/ 찬바람이 몰아치는디/ 무거운 걸음으로/ 두리번거리며 모여든다/ 어느 외진 무덤 앞에 서더니만/ 사진 두 개를 세워 놓는디/ 한사람은 대학 학사모 청년이요/ 또 한 사람은 앳띤 여고생 차림이라/ 그 앞에다 젯상을 차려놓고/ 신방에 쓸 이불이며/ 혼례복을 널어놓고/ 무녀 한 사람 나오더니/ 넋이야 넋이로다/ 두 사람 영혼을 불러내니..../

세마치장단의 판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영혼결혼식을 읊는 대목이다. 불러낸 영령은 누구실까? 신랑은 광산출신 윤상원이요 신부는 보성태생 박기순이다. 윤상원이라. 너무나도 잘 알려진 5.18의 상징적 인물이다. 계엄군에 대항해 싸우던 전남도청의 시민군들, 그 마지막을 장식했던 장면들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다. 보도를 통해, 사진을 통해,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흉중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윤상원을 소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장편 판소리라는 예술 장르를 통해 불러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허공에 뿌려졌던 비명과 비탄, 하지만 당당했던 윤상원과 시민군들의 목소리를 옹골진 판소리로 불러낸 것. 가히 임진택답다. 그가 소환해낸 인물 연대기가 여럿이다. 다산 정약용이며 장보고를 포함해 최근의 장편 판소리 작업들 속에 윤상원가도 포함된다. 다른 소리들에 비해 결이 다른 듯하다. 이유가 있다. 윤상원과 임진택의 살아생전 인연 때문이다.

윤상원과 임진택의 광대 인연

임진택이 밝히는 윤상원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1979년 섣달 그믐, 임진택은 광주의 모 송년행사에 초청되어 그의 장기였던 '소리내력'을 공연하게 된다. 소리내력은 주지하듯이 김지하의 담시에 임진택이 소리를 입힌 창작판소리다. 담시 '비어'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첫 번째 대목을 노래한 것이 '소리내력'이다. 이른바 운동권에 널리 회자되며 인기몰이를 했던 곡이기도 하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 뜻밖에도 윤상원이 '소리내력'을 부르는 것 아닌가. 알아본즉 임진택의 녹음을 듣고 소리를 배웠다더라. 임진택은 이때의 기억을 "나보다 더 소질이 있고 목청이 유별났으며 나보다 더 판을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고 술회하곤 한다. 둘은 당장 의형제를 맺어 의기투합을 했다. 이후 1980년 3월 15일 '돼지풀이 마당굿'에서 다시 만난다. 광주지역 문화운동패 '극단 광대' 창립행사 일환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 만남을 오래 두지 않았다. 불과 두 달 후 현대사의 비극 5.18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90년,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아 임진택은 '오월광주'를 작창한다. 그의 창작판소리가 가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상원에 대한 부채감이 그 누구보다 컸던 모양이더라. 딱 두 번 만난 사이인데도 매우 오래된 친구나 다름없었음을 여러 곳에서 피력하곤 했으니. 임진택이 술회하는 윤상원과의 닮은 꼴들이 많다. 대학시절 연극과 탈춤에 빠져 지냈던 점, 남다른 소리꾼 역량을 지니고 있던 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운동권으로 나선 점 등 구구절절하다. 아마도 창작판소리 '윤상원가'를 작창하게 된 필연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윤상원은 임진택을 통해 우리 곁으로 소환되었다. 이 창작판소리가 다른 소리들과 결이 다른 이유는 당대의 역사라는 점을 넘어 우리에게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들불 야학의 인연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윤상원이 그시부터/ 먼저 떠난 기순의 시신을 지킬 적에/ 짧은 세월 함께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중략) 불꽃같이 살다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그대는 정말 죽었는가/ 믿어지지 않은 너의 죽음 앞에/ 나는 믿는다/ 그대가 살아 올 것을/ 그대가 불꽃으로 다시 일어/ 훨훨 타오르는 들불로 살아/ 이내 가슴 텅 빈 가슴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을/ 나는 믿는다 갈망한다/

윤상원을 들불야학으로 이끌었던 박기순이 뜻밖에 연탄가스 사고로 죽게 된다. 이때의 심정을 처절하지만 담담하게 노래한다. 선율을 넘나드는 처연함이 느린 중모리에 실리니 영안실의 시신을 붙잡고 흐느끼는 장면이 살아나온다. 1978년 당시의 윤상원이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올리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인연이 다시 인연을 만들고 또 역사를 만들어왔나 보다. 불과 2년 후 1980년, 윤상원은 시민군의 핵심 인물이 되어 전남도청에서 산화하게 된다. 임진택의 소리를 곱씹어 듣노라면 이들 죽음의 연대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살고 죽는 일에 대해 초연해질 수밖에 없음을. 소수의 인원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져갈 때 윤상원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빗발치는 총알들 사이 도청 유리창밖 하늘은 누구를 떠올리게 하였을까? 5.18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1982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린다. 주지하듯이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을 차용해 글을 짓고 김종률이 곡을 붙여 추모곡을 만든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한 내력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추모에 그치지 않았다. 영혼결혼식 이후 구전으로 복사본으로 빠르게 회자되더니 이내 5.18광주민주화항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게 된다. 노래가 부활하고 윤상원이 부활하고 박기순이 부활했던 것. 임진택의 소리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계엄군들의 화려한 휴가, 빗발치는 총탄 사이에서

그때여 도청 상공/ 군헬리콥터들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내려왔다 올라갔다/ 때 아닌 애국가가/ 울려퍼지더니/ 갑자기 총소리/ 탕~~탕/ 탕탕탕/ 시위대열 일순간에 좌우로/ 물결처럼 좍~/ 갈라진다/ 저놈들이 발포를 했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 시위대 차량들이/ 광주시를 빠져나가/ 총기에다 탄약에다/ 실탄을 확보하여/ 도청앞으로 다시 집결/ 총격전을 벌일 적에/ 계엄군 거동봐라/ 계엄군 거동봐/ 관광호텔 전일빌딩/ 요소요소 건물마다/ 매복 은폐하야/ 조준사격할제/ 갑자기 군헬기가/ 저공비행터니/ 따따따따따따따/ 기총소사를 가한다/ 시민들 피흘리며 사방으로/ 피할적에 금남로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는구나/

1980년 5월 21일 상황을 노래하는 장면이다. 소리는 단중모리에서 잦은모리로, 다시 빠른 자진모리에서 휘모리까지 급박한 상황을 묘사해나간다. 이때가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아니리의 언설대로 부처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져야 할 날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은커녕 예수님도 하나님도 오시지 않았다. 39년이 지난 엊그제야 밝혀진 사실들이 우리를 다시 놀라게 한다. 전두환은 이때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와 발포를 명령했고 화려한 휴가를 나온 계엄군들은 5월 19일을 정점으로 강간까지 감행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으며 귀를 열어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할 말을 잃는다. 계엄군의 구성에서도 계층간 지역간 위화감을 적극 활용했다는 얘기기 회자된다. 현대사의 모순을 안착시킨 악의 무리들 아닌가.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 임진택의 윤상원가 사설이 수정 보완될 듯하다.

윤상원을 창작판소리로 불러내는 까닭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뚫어/ 저 담을 넘어/ 원혼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끝끝내 뚫고 넘어/ 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어머니~~/

윤상원이 죽음을 앞둔 상황, 느린 진양조는 '소리내력'의 사설과 겹쳐 노래된다. "사방은 칠흙같이, 쥐죽은 듯 적막할제, 시민군들 어느 결에, 총을 꼭 껴안고는, 살풋 잠이 든" 상황이다. 장엄과 비탄의 소리임에도 골계(滑稽)의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때때로 웃고 때때로 울부짖는다. 장단을 휘몰아 정신없이 내닫다가도 이내 매우 느린 진양조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판소리의 격조가 그러하다. 이때 윤상원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느라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지나간 젊은 날들, 회한이 밀려온다. 임진택은 독백의 아니리를 통해 이렇게 구술한다. "이 싸움은 분명 패배요 전멸당할 것이지만, 그냥 이대로 총을 놓고 항복하기에는 지난 항쟁이 너무나 장렬했다. 항쟁을 완성시키자면 누군가 여기 남아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야만 한다. 나는 그 길을 택하리라." 임진택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윤상원의 결기다. 새벽 두시 조명탄이 터지고 대낮처럼 밝은 전남도청으로 총탄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진모리로 사설들을 몰아 엇모리로 이어진다. 대하드라마 같은 소리가 끝나는 지점임을 알겠다. 산산이 부서진 시민군들의 육신 위로 별빛들이 쏟아진다. 짐작하겠지만 대미는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이다. 윤상원은 그리고 박기순은 이미 노래로 부활했다. 정작 부활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우리들 자신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초연할 이 그 누가 있겠는가만, 항쟁 40주년을 바라보는 여기 이 자리,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을 불혹의 이름으로 다시 윤상원을 불러본다. 우리 어깨 겯고 그대 다시 부활하라.

남도인문학팁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윤상원歌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윤상원歌는 두 가지 관점이 부각된다. 하나는 윤상원의 생애가 가지는 갈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5.18항쟁에서 문화투쟁의 작동방식과 상황을 역사에 서술하는 일이다. 오는 5월 26일, 오후 3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오월광주 윤상원歌'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공연에는 젊은 판소리꾼 다섯 명과 고수 두 명이 임진택과 함께 공연한다. 송나영, 왕윤정, 전태원, 조정규, 김기진이 소리를 분담하고 최효동, 감한샘이 북장단을 분담한다. 분창 혹은 입체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판소리 공연사에서 주목해야 할 전개 방식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소리꾼이 한 사람의 고수와 공연을 하는 것이 판소리의 격식이라면 이번 방식은 판소리의 사적 전개 방식을 재현하고 미래의 방식들을 실험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스승 임진택과 판소리계의 새싹들이 만나는 청출어람의 장이요, 질곡의 현대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소리난장이다. 소리로 소환되는 윤상원을 옷깃 여며 추모한다.

생전의 윤상원 열사. 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국악인 임진택 .뉴시스

창작판소리 윤상원가 공연 팜프렛

광주 광산구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명창 임진택의 판소리 토크콘서트 '오월의 노래' 한 장면. 광산구 제공

광주 광산구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명창 임진택의 판소리 토크콘서트 '오월의 노래' 한 장면. 광산구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