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4> 燒身供養… 그들의 위대한 희생이 사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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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4> 燒身供養… 그들의 위대한 희생이 사원을 밝혔다
베트남 달랏! 소신공양 그리고 아름다운 꽃
  • 입력 : 2022. 09.01(목) 16:32
  • 편집에디터

죽림사원. 차노휘

베트남 사람들 70%가 불교신자이다. 그 뒤를 가톨릭(20%), 까오다이교(5%) 그리고 민간 토속신앙이 잇는다. 다소 생소한 까오다이교는 20세기 초에 생긴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신생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듯 불교, 가톨릭, 도교, 유교, 이슬람 다섯 신을 모신다. '높은 곳을 보게 되(높은 곳을 가게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까오다이(高台)' 또한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신이 있는 곳 즉, '천국'을 가리킨다. 인류구원의 날에 천안이 나타난다고 믿는데 '천안(天眼)'은 지구본처럼 생긴 둥근 '눈'이며 이 종교의 심벌마크이다.

불교 또한 지난한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틱꽝득(석광덕, 1897~1963)' 스님의 소신공양을 들 수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산사람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작열통으로 심장이 멈춰버리는 쇼크사를 먼저 당한다. 인간의 근육 또한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아서 불의 강도가 셀수록 움츠러들어 결국은 온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생을 마감한다. 이를 잘 알았던지, 틱꽝득 스님은 소신공양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한다.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이다."

죽림사원. 차노휘

1963년 6월 11일 호치민 캄보디아 대사관 앞 사거리에서 틱꽝득은 휘발유가 뿌려진 제 몸에 스스로 불을 지폈고 불길이 살아있는 15분 동안 가부좌 튼 그 모습 그대로 열반했다. 그의 자유를 향한 종교적 신념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그의 소사체는 하늘을 보며 쓰러졌다. 이 숭고한 최후에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절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감시하고 있던 경찰까지 절을 올리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베트남의 역사를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케이블카 풍경. 차노휘

1954년 봄, 베트남 독립 영웅 호치민은 백 년 동안 식민 지배를 했던 프랑스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격멸시켰다. 프랑스가 철수한 곳에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가 염려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남부에 자리를 잡았다. 친프랑스파인 바오다이를 대신해 CIA가 발탁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정부를 1955년 10월에 수립했다. 지엠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모든 형태의 반정부 운동을 무차별 탄압했다. 집안 자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소수의 가톨릭계의 지주들을 보호하고자 게릴라 지역을 점령하면 빈농의 토지를 다시 빼앗아 지주에게 돌려주는 '뒤집힌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장교들은 군 예산을 착복했으며 관리들은 탈세를 눈감아준 대가로 재산을 모았다. 설상가상 군대 장교들은 대부분 프랑스 식민정부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매국노들이어서 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더욱더 조직적으로 국민들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불교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63년 5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 2527주년인 만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련의 축하 행사가 열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국민의 80% 이상이 불교 신자였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먼저 선교가 되었지만 인구의 10%만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을 국교로 하겠다는 응오딘지엠은 불교의 맥을 끊고자 했다. 종교적인 상징을 내세우고 거리 행진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며 석가탄신일 축하 행사를 진압할 것을 경찰에 명령했다. 수십여 명의 스님들이 경찰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 숨지거나 다쳤고, 수많은 스님들은 연행되었다.

죽림사원. 차노휘

수년간 면벽수행에 정진했던 틱꽝득은 독재 정권의 불교 탄압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통 받는 스님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침내 베트남 불교와 자유를 위해서 소신공양을 실천했던 것이다.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이 있은 지 59년이 지난 베트남 달랏 죽림사원은 오후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호치민 통일궁의 설계자인 응오 비엣 투의 설계로 1993년에 시공하여 1년 만에 완공된 사원 곳곳에는 잘 정돈된 꽃정원과 분재 그리고 나무는 제각각의 특성을 드러내며 사원의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대웅전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는 불교신자들의 등 너머로 2m 부처 좌상과 그 좌상을 양쪽에서 호위하고 있는 상아 6개 달린 코끼리를 탄 부처와 사자를 탄 부처를 보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곳도 한국처럼 대승불교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4개의 사찰을 돌기 위해서 뜰로 나섰다. 사원에 오기 위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달랏 시내를 한 눈에 담고 와서인지, 여전히 뭉게구름 위에 서 있는 듯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여름인데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 이마를 쓸고 갔으며 청아한 새소리와 향긋한 향기가 사원을 감쌌다. 토방에 개 한 마리가 달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봤을 때는 그야말로 '높은 곳을 보게 되(높은 곳을 가게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까오다이(高台)'의 '높은 곳'인 '천국'이 아닌가 싶었다. 까오다이교도 기본적으로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어 금욕, 살생금지, 선행과 자비로운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트남 불교가 있기까지 틱꽝덕 스님의 소신공양에 이어 서른 명에 다다르는 스님들의 소신공양이 뒤따랐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많은 목숨들을 내놓아야 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졌지만 일 년 동안 쿠데타로 혼란의 시기를 겪다가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뒤에야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희생들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서 이곳 사원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코끝이 시려 걸음을 멈추고는 투에람 호수(Tuyen Lan Lake)가 한 눈에 보이는 풍황산에 위치한 죽림사원에서 대한민국 어디 즈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코를 맡기며 턱을 들고는 먼 산을 눈가늠하기 시작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