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니 첸 감독 ‘브레이킹 아이스’ 포스터. (주)디스테이션 제공 |
![]() 안소니 첸 감독 ‘브레이킹 아이스’. (주)디스테이션 제공 |
연길에서 가이드 일을 하는 나나(배우 주동우), 친구 결혼식 참석차 연길에 왔다 휴대폰을 잃어버려 고립되고 만 여행객 하오펑(배우 류호연), 나나의 남사친 샤오(배우 굴초소). 이들은 과거의 상흔과 미래의 불확실함 속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어쩌지 못한채 ‘어쩌다 어른’이 되어 있다. 이들에게 드리워진 불안한 우울감은 공통적이다. 나나는 여행객 하오펑에게 마음이 쓰여 샤오와의 저녁식사 자리에 동행한다. 나나의 집 소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상하이로 가려던 하오펑은 그만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다음 비행기를 타려면 연길에 한 주를 더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한주간의 동행이 시작된다.
우연한 만남에도 이들은 친구처럼 어울린다. 한 오토바이에 셋이 올라타고 술을 마시다 밤거리를 배회한다. 함께 서점에 들르고 마켓에서 장을 보며 카메라는 연변의 생활문화를 투어처럼 보여준다. 억압된 과거 그리고 무의미와 암담함이 교차하는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기는 이들은 이유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무연한 스킨십을 단순한 친밀감으로 표출하는 등 충동적으로 부유한다. 어쩌면 이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우울은 서로에게 거울처럼 비추어지면서 미묘한 위로를 받거나 한소끔 성장을 이끌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흑곰과 맞닥뜨린 신에서 이들 청춘이 두른 쓸쓸함과 무력감, 더 이상 나아가지질 않는 정체 등이 침묵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영화 연출력이 부여하는 놀라움이다. 감독은 이렇듯 세 청춘의 성장통을 조심스럽게 사려깊은 시선으로 읽어낸다. 차가운 계절 얼어붙은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이 서로의 마찰열로 온기를 나누며,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발걸음을 그림으로써 가히 ‘침묵 속 위로’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일종의 로드 무비의 형식으로 흘러간다. 국경도시 연길의 특성, 조선족의 생활문화, 결혼식 풍정에서 공감하게 되는 춤사위, 백두산과 천지의 겨울을 화면에 담아 우리 민족으로서는 선망하는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해소시켜 준다. 우리에게 공명하는 정서와 무관하게 싱가포르인으로서 감독은 자국에서 보기 어려운 눈과 얼음, 한파 등 겨울의 계절감을 더 선망했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자치구 연변은 연변만의 특징이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적의 연변 마을 마을마다 팔작지붕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바로 조선족의 집이다. 더불어, 연변거리의 한글 간판을 보거나 억양 있는 한국어를 듣게 되면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게 한다.
2015년의 일이다. 연변대학교에서 세미나를 하던 중 필자가 ‘1989년 공산주의의 붕괴’를 공인된 사실로 언급했을 적에 강하게 딴죽을 걸었던 한 조선족 교수가 있었다. 그는 북한의 유일사상에 깊숙이 침잠돼 있던 양이어서 적잖이 놀랍기도 했고 보이지않는 거리감이 생각보다 크다 실감했던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연변 조선족이 한국의 교과서 보내주기를 요청했을 적에 대한민국 정부는 호응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적극적으로 보내주었기에 유치원 및 초등 교육에 북한의 교과서가 쓰여왔던 것이다. 이들에게 교과서나 출판물을 보내주는 일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만큼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의 통일에는 연변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만이 아니었다. 문화·사상적으로 우리 민족인 조선족과 교감하고 교류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구나 새삼 절감했던 곳이었다.
첸 감독의 입장에서 연길은 다층적인 의미를 두는 곳이다. 즉, 이 도시는 중국인가,한국인가. 아니면, 이들 문화가 혼재된 나머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 독자적 도시인가. 부유하는 청춘들의 성장통을 그리기에 적절한 배경이었을 것 같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